<시간이 지나도 지속되는 학습의 결과물로 경험한 바를 획득하고 저장하며 나중에 다시 회상할 수 있는 마음의 기능>
구글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기억'의 뜻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 역시 생각이라는 범주 안에 기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직접 기르지도 않는 길고양이마저 출퇴근길에 자주 보면 왠지 날 보고 아는 척 인사를 하는 느낌이 든다. 기억이란 비단 인간의 전유물 만은 아닌것 같다.
쉬흔이 넘어도 여전히 잘생기고 멋진 정우성과 여전히 아름다운 손예진이 함께 연기한 <내 머릿속의 지우개>도 기억에 대한 영화다. 한창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 병을 앓아 기억을 잊는 여자와 그를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내용을 그린 작품은 기억을 잃는 일이 당사자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여지없이 보여준다.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이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준 <이터널 선샤인> 역시 잊고 싶은 기억의 일부분을 강제적으로 지워 사랑하는 사람을 잊게 하는 파격적인 설정을 이야기한다. 또한 일부러 기억을 조작해 억지로 상대에게 사랑의 감정을 심어두기도 한다.
역시 짐 캐리가 주연한 20세기 최고의 리얼 버라이어티 쇼 <트루먼 쇼>는 갓난아이 한 명을 데려다가 태어날때부터 극중 현재까지 완벽한 속임수로 인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조작한다. 그가 바다의 벽을 나서서 진짜 세상으로 진입하는 순간, 그에게는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질 것이다.
멕시코의 정서와 화려하고 찬란한 사후 세계를 그린 <코코>에서는 이승에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때 저승의 귀신이 진짜 사라진다고 말한다. 기억은 이제 이승 뿐 아니라 저승에서도 정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드라마를 싫어하는 아내마저 관심있게 보고 있는 <눈물의 여왕>도 여주인공의 생명연장을 위한 수술의 부작용으로 그간의 기억을 잃는 설정을 차용한다. 기억이 없어지면 부모와 형제, 사랑하는 사람마저 모두 잃게 된다는 설정은 극의 긴장감을 더욱 높여주는 부비트랩이 된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아침에 눈뜨면 바로 옆에 누워 잠들고 있는 아내를 내 아내라 알게 만드는 장치임은 틀림없다. 너무 좋아 1년간 죽자고 연애해서 결혼에 골인하고 17년째 살고 있는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의 사랑으로 태어난 두 아들을 모두 그 자체로 만들어주는 장치다. 내 기억이 일부분 사라져버린다면 둘째아들의 존재를 부정할지 모른다. 그보다 더 좁은 영역으로 예를 든다면 지하철로 5정거장 거리에 사무실로 향하는 방법을 잊어 출근을 못할수도 있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숨쉬고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특이점 없이 평온하게 유지시켜주는 본능에 기인한 역할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 기억력히 옅어져 치매에 걸리는 것은 어찌보면 생로병사의 측면에서 볼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령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현 시점에서 노령인구 천만, 그 가운데 백만이 치매라는 사실은 재앙이 아닌 지극히 당연한 현실적인 풍경이 되버린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그로인해 매복하고 있던 치매라는 병이 고개를 든다. 평생을 살아온 당신에게 치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잃는 건 너무 가혹하고 잔인한 일이 틀림없다.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 사회적 위치마저 망각하게 만드는 쓸쓸한 일이다.
영화나 드라마 설정처럼 한 순간에 뻥튀기 만들듯이 그런 일이 생기진 않겠지만, 기억을 위한 노력이 점차 더뎌지고 소홀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활자를 읽기보단 영상을 흡수하고, 메모를 하기 보단 타이프를 통해 기록을 남기는 사소하지만 점진적으로 '기억을 위한 운동'을 나약하게 만드는 일들이 쉽게 일어난다. 하물며 좋아하는 취향의 묶음도 이젠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에 맡겨두는 시대다. 통탄할 일이다.
기억은 존재다. 존재를 존재로서 설명해주는 근거이자 다른 무엇보다 확실한 이유가 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잊게 되는 망각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 또한 인간이기에 갖춰야 할 작은 책임감이 아닐까 싶다.
너무 빨리 만들어지고 소모되고 사라지고 잊혀지는 세상이다. 모든 것들이 그렇게 숨가뿐채 흘러간다. 더욱이 그러길 마치 바라는 것 처럼 매체와 미디어는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 많아도 너무 많고 넘쳐나도 너무 넘쳐나는 시대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과 잊어선 안될 것들을 기억하며 오늘을 이어가고 싶다.
기억하며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