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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 슈렉 Mar 28. 2024

가계부 쓰는 남자

결혼을 앞두고는 누구나 자기만의 로망이 있을 것이다. 침대만큼은 크고 좋은 것을 고집한다거나, 주방에 몹시 신경을 쓴다거나 혹은 TV를 정말 큰걸 준비해야 하다는 등등 말이다. 그런 면에서 아내에게 유일하게 부탁한 것은 전기오븐이었다. 결혼하면 쿠키, 머핀, 빵, 케이크까지 직접 만들고 싶어서였다. 물론 아내는 흔쾌히 응해주었고 지금까지도 17년차 오븐은 가끔씩 내 기분전환을 위한 유쾌한 도구가 되어주고 있다.


반면, 아내는 단 하나 가계부를 같이 쓰자고 했다. 나에 비하자면 경제관념이 완벽에 가깝게 자리잡은 아내의 생활력을 떠올리면 결코 무리도 아녔다. 버는 족족 쓰기 바빴고, 가끔 저금은 했으나 통장 잔고는 관심도 없던 내게 가계부라니... 그것은 마치 연애 시절 식사 메뉴 고르라고 했더니 아내가 '죽'을 골랐을때의 느낌과 몹시 흡사했다. 아니 어떻게 세상 그렇게 많은 음식 메뉴 중에서 소화가 잘 된다는 이유로 죽을 고를수가 있을까.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우리의 첫 가계부 작성이 시작되었다. 미니가계부라고 이름지어진 웹사이트 가계부였는데 써본적도 없는 내겐 모든 것이 생소했다. 수입, 지출, 저축, 한달 고정비 내역 등등... 상식적인 선에선 그러려니 하고 수긍될 내용들이었는데 도대체 왜 뭐때문에 가계부를 써야 하는지 솔직히 당시엔 전혀 감이 안잡혔다.


하루에도 참기름 너댓병씩 만들 정도의 달콤한 신혼 생활을 누리면서 가계부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깜빡하면 아내가 백업해줬고, 지출 카테고리가 틀리거나 표기법이 일관되지 않으면 고쳐주기도 했다. 그렇게 몇달이 흘렀고, 월별로 보고서를 훑어보니 제법 재미가 쏠쏠했다. 4월 한달 식비 지출이 얼마였고, 문화비 지출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걸 쓰면 돈을 아껴쓰게 되나?'


아내에게 백번도 넘게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던 질문은 한동안 속앓이 하듯 입속으로 삼키기만 했다. 꼬박 1년이 흘렀다. 월별로 보는 것과 1년치를 묶어서 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당장 지출이 줄어드는 효과는 미비했으나, 나와 아내 둘이 번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가 한 눈에 시원하게 보였다. 스타크래프트를 할때 맵핵을 켜서 지도 전체를 맑게 내려다보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시작한 가계부 쓰기는 17년차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보험비는 저축이 아닌 지출로 잡아 약간 잊혀진 돈으로 묵혀둔다. 가끔 사는 로또는 문화비에 레저로 분류한다. 매달 1일엔 본가와 처가 앞으로 일정 금액씩 나름의 저축을 한다. 지내고나니 뜻하지 않은 경조사에 그만한 보험도 없었다. 신랑과 색시로만 입력된 초창기 가계부와 달리 첫째와 둘째의 이름도 자주 등장하고, 아이들의 교육비 학원비 학용품비도 점점 비중을 늘린다. 무엇보다 한달 식비가 가장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입이 네개니 그럴 수 밖에. 하물며 사내 녀석 두놈의 먹성은 나날이 확장하고 있다.


방탕한 20대를 보낸 탓에, 꾸준한 경력따위는 일절 신경도 안쓴 탓에 그리 넉넉하지 않은 수입이었다. 하물며 출산과 더불어 외벌이로 지내면서 넉넉함은 더욱 협소해졌다. 다행히도 알뜰한 아내 덕분에 단 한 번도 월단위 가계부에 마이너스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이제는 소소한 알바를 통해 아내의 수입 대부분을 저축으로 이어가고 있으니 가계부를 들여다 볼때마다 그 즐거움에 흐뭇해진다.


나가는 돈 만큼 들어오는 돈도 꼼꼼하게 기입한다. 특히 돈이 아닌 수입, 본가와 처가에서 주시는 반찬이나 먹을거리까지 꼼꼼하게 기재한다. 어릴적부터 내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고모님께서도 자주 지원을 해주셔서 수입 카테고리에는 별도의 소분류도 만들었다.


'시댁사랑, 친정사랑, 고모사랑, 고마운분'


매달 받는 월급도 기분 좋지만, 이 네개의 카테고리에 수입이 기록되면 괜히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들이 꼬꼬마 시절엔 데리고 외출하다가 지하철이나 공원에서 아이가 이쁘다고 맛난거 사주라고 처음 보는 어르신들께서 천원 이천원 주신적도 제법 있었다. 그럴땐 고마운분의 소분류가 '쨔쟌~'하고 등장했다.


가끔은 수입도 지출도 아무것도 없는 날도 있었다. 집에 있는 음식들로 식사를 하고 외출도 하지 않는다면 으레 그런 날은 종종 찾아왔다. 아무래도 어떤 행위를 하면 지출과 연결되는 것이 맞지만, 비단 지출을 하지 않더라도 그래서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날이지만 그날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는 아득한 기억에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다. 그래서 가계부는 어떤 면에서 일기장과도 같다. 조금 영역을 확장지어보면 우리 네 식구의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첫번째 결혼기념일에 함께 즐긴 뮤지컬 공연. 스무번도 넘게 즐겼던 집들이. 아이들의 병원간 흔적. 여행의 추억. 어린이집 졸업식. 초등학교 입학식. 운동회. 생일파티. 장인어른 환갑잔치. 부모님 금혼식. 기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진다.


가계부와 함께 평생 처음 용돈기입장도 쓰게 됐다. 내 마음대로 써도 되는 이른바 '순수 유흥비' 명목으로 차마 밝힐 수 없는 금액을 용돈으로 책정하면서 결혼한 그 해부터 써온 용돈기입장이다. 이건 아내에게 살짝 비밀로 하고 싶어서 명함크기의 양식을 만들어 수기로 기입하고 있다. 대부분 CD 구입과 술 값으로 나간다. 그러던 중 첫째가 태어난 그해부터는 어린이재단과 지지 정당에 후원도 용돈에서 한다. 술 한 잔 덜 먹지. CD 한장 덜 사지. 정말 몇 푼 앋뇌는 돈이지만 아이를 둔 아빠로서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 지출이다.


1원 단위 지출도 모두 기입한다. 월말이 되면 그달의 수입과 지출을 견줘 남는 차액을 저축한다. 저축한 돈이 어느정도 불어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기예금으로 묶는다. 매달 1일이 되면 그달의 고정 지출을 설정한다. 한달간 썼던 용돈기입장은 서랍장에 넣어두고, 그달의 새 용돈기입장을 꺼내 지갑에 꽂아둔다.


가계부는 일상을 달콤하게 만들어주는 막대사탕이다.

가계부에는 우리 식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된다.

그래서 나는, 가계부를 쓴다.

가계부 쓰는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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