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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두두 Jan 27. 2022

남편에게 브리핑한 퇴사(안)

무작정 그만둔다는 거 아니다?

약 5개월 후로 퇴사 예정일을 잡았다.


나의 앞날에 대한 대안을 남편에게 브리핑할 때가 오고야 말았다. 그동안 혼자 가슴앓이하다 문득문득 욱하고 내지르는 성질머리를 잘 견뎌준 남편이다. 이젠 터 놓고 얘기할 때가 되었다. 대화라기 보단 일종의 브리핑이었다. 나의 상황이 이러하며 대안은 이러하니 당신도 고려하고 있으라는 사전 통보에 가까웠다.




1안


사실 내가 원하는 1안은 퇴사가 아니었다.

직장 내에서의 새로운 변화였다. 내가 일의 의미감을 가질 수 있는 분야로 옮기고 싶었다. 첫 번째 옵션은 같은 부서 내에서 다른 직무로 전환하는 것이다. 부서장님도 가능성을 인정해 주셨고 직무 전환을 위해 노력해 보시겠다고 하셨다.

두 번째 옵션은 다른 부서로의 발령이었다. 나를 끌어주려고 마중물 역할을 3개월 전부터 해 주신 분이 있었다. 인사팀에게 꾸준히 나를 콕 찍어 본인의 부서로 보내달라 요청을 두 번이나 하셨더랬다.


나의 의지를 명확히 알리고자 인사팀 담당자와도 개별 면담을 했다. 회사에서 매년 연말에 진행하는 자기 신고서에도 매우 전향적으로 직무 전환 검토를 요청하며, 그 요청 직무와 부서도 자세하게 작성하였다.


속으로만 끙끙 앓았던 내가 아니라,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한 알리고, 요청했다.


1안은 되지 않았을 경우의 대안도 필요했다. 




2안


나의 2안은 퇴사였다.

이미 변화를 꾀한 지 1년이 넘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바에야, 비전도 없고 성장 가능성도 없고 좌절감은 너무 클 것 같고. 그래서 그냥 쉬고 싶었다. 남편에게 내가 너무 힘들다고 얘기했다.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고. 나도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재능을 살려 일을 하겠다고.



3안


그리고 구색을 맞춰 준비한 3안은 이직이었다.


하하하. 매우 안정적인 3가지 대안. 회사에서 기획서 쓰듯이 어중떠중 3안을 떠올리고 있다. 구색을 맞춰 안을 마련한 것도 참 웃긴 일이었다.


공감도 잘 하지만, 날카로운 분석자인 나의 남편은 일단 3안을 배제했다. 3안에 대한 나의 설명과 의지가 전혀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호. 무섭다. 꿰뚫어 보다니.

이래서 객관적인 시각은 정말 중요하다. 이실직고했다. 그래, 이직은 사실 내키지 않는다. 그냥 구색 맞추려고 넣어놓은 것이다. 구체성이 없는 대안은 대안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인정해야 한다.

덕분에 나는 3안을 끌어안고 구직사이트를 순회하다 시간을 버리는 것을 딱 하루 만에 그만두었다.



11월 중순

나의 1안은 이제 내 손을 떠났다. 12월에 결정이 될 때까지 나는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기다릴 수가 없다. 참 지랄 맞는 성격이다. 나의 2안에 대한 소망도 무시 못 할 비중이어서, 2안을 할 경우를 가정했다. 물론 1안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실현될 퇴사 예정일이다. 다음 해 3월 5일. 일단 퇴사 예정일을 정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준비하는 기간으로 효율적인 생활이 가능해지며, 여유 있는 마음으로 1안의 결과를 기다릴 수 있었다. 또한 오히려 퇴사 예정일의 한 달 전까지는(보통 한 달 전 퇴사 의사를 밝혀야 하니) 직무 몰입도가 높아지는 경험도 할 수 있다.


다만 몇 달 후 쓰게 될 퇴직사유에 무엇을 쓸까 고민하게 되었다. 끝까지 인정의 욕구는 사그라들지 않으니, 퇴사하는 명분을 "이곳이, 이 일이, 이 사람들이 싫어서 회피한다"는 것이 아니라 "저 곳이, 저 일이, 저 사람들과 일하고 싶어서 이별한다"는 것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퇴사를 생각하면서도 나는 회사를, 일을, 사람을 포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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