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도 아니고 회사 탓도 아니고 회사가 맡고 있고 내가 얽혀 있는 사업의 올가미 탓이다. 내가 회사를 그만둬야 벗어날 수 있는 모두가 힘든 올가미다.
대책 없는 3안도 일단 버렸다.
사실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타이밍 좋게 내가 성장하고자 싶은 분야의 작은 전문회사 대표님과 이직에 대해 얘기가 오가기도 했다. 직전 연봉의 30%를 깎으면서도 배우는 입장으로 겸손하게 합류해 볼까 했었다. '열정 페이로 일 할 나이가 아니다.' '이직하면 더 바빠질 텐데 아이들은 어떡할 거냐.'라는 주위의 말도 가뿐히 흘려 들었다. 그런데 '너의 강의 스타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 스타일로 다 바꿔야 돼.'라는 말에 안녕을 고했다.
그래서 2안 퇴사를 멋지게 하기 위한 플랜을 세웠다.
> 퇴사 후 에너지 버스 정하기
이미 자기 분석을 통해 나의 강점을 들여다봤다. 일의 의미도 고려해 내가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성찰했다. 내 인생에서 제3의 직업으로 정한 것이 러닝 퍼실리테이터다. 말은 그럴싸 하지만 참여적 교수법을 연구하고 활용하고 전파하는 일이다. 그 모습을 실현시키기 위해 읽어야 할 책, 이수하고 싶은 교육과정들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되었다.
한참 힘들 때, '너 그만두면 뭐 하려고?'에 질문에 '그냥 도서관/서점/카페 등에서 책에 파묻히고 싶어'라고 얘기했었다. 그러면 '여행이나 실컷 다니고 놀고먹고 하지 뭘 또 책에 묻히고 싶다냐.'라는 동료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거나 퇴사 후 읽을 책 리스트에서 몇 권을 뽑아 온라인 서점에서 결제를 해 버렸다.
나는 놀고먹긴 글렀다.
> 회사 이벤트 고려해 날짜 정하기
사실........ 사실 가장 중요한 이슈다.
3월 5일로 퇴사 예정일을 정한 것은 연말, 연시 꿀 같은 각종 성과급 등을 고려한 일정이다. 일단 1월은 설 상여금과 전년도 성과급을 받고, 2월에는 연말정산 환급금을 받고, 3월에는 당해연도 연차가 발생하니 연차수당을 받고 퇴직하려면 3월 이후여야 했다.
회사 내부적으로 퇴사처리가 가능한 일정이 따로 있다. 이것은 미리 민망함을 무릅쓰고 인사팀 담당자에게 문의해봐야 한다. 그도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 봤는지 매우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려 준다.
조금 친분이 있다면 며칠 날짜로 퇴사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물어보는 것도 좋다. 회사에 따라 당월 하루만 근무해도 한 달 월급을 통째로 지급해 주는 곳이 있고, 무조건 근무한 일수대로 계산해서 주는 회사가 있고, 몇 일을 기준으로 그 전에는 일할 계산 그 이후에 퇴사하면 월급을 지급해 주는 회사가 있다. 일할계산이라면 최대한 주말, 공휴일 다 끼고 퇴사 날짜로 정하는 것이 좋다.
아, 실질적으로 회사는 안 나가지만 연차휴가를 최대한 붙여서 퇴사 날짜를 늦게 하는 것이 이득인지 그냥 퇴사하고 연차수당을 받는 것이 이득인지 잘 따져봐야 한다. 이것도 혼자 계산하지 말고 인사팀 담당자에게 무어보면 된다. 그만둘 건데 뭐가 민망하다고.
> 내 앞으로의 대출 갚고 비상금 마련하기
맞벌이를 하다 외벌이가 되었을 때, 뚜렷한 이직이나 프리랜서 활동 계획을 장담하지 못할 때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내가 쫓기지 않아야 한다. 돈 때문에 퇴사를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일단 남편은 외벌이도 기꺼이 하겠다며 지지선언을 했다. 그래, 남편의 명의로 되어 있는 대출은 어떻게든 갚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는 비교되게 안정적인 생활을 해 주는 남편이 고맙다.
나의 명의로 되어 있는 대출을 정리해 봤다. 대학원 다니면서 흔적을 남겨놓은 학자금 대출 1학기 분, 그리고 이사하면서 빌린 신용대출이 있었다. 퇴사할 때는 내 명의의 대출이 없어야 마음이 자유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연초에 받은 상여금과 주식을 팔아서 대출을 갚기로 했다. 그리고 두 아이의 유치원 6개월 학비를 쟁여 놓았다. 서울은 그냥 동네 유치원도 한 명에 월 40만 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