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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l 23. 2023

보 이즈 어프레이드 단상

광화문. 에무시네마. 보 이즈 어프레이드.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처절하게 떨치고 싶은 모성을 향한 애증

에무시네마 영화 데이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이자 역대 아리 애스터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아리 애스터 감독이 만들지 않은 듯한 영화이다. <유전>과 <미드소마>를 영화관에서 보지 못해 안타깝지만 이 두 영화는 집에서 봐도 더럽게 찝찝하면서도 무섭다. 불가해한 분위기에서 인지 혹은 이해 불가능의 사건, 감정, 인물로 계속해서 관객을 몰아붙이는 느낌이다. 그런데 과격하게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드는 물에 옷이 착 달라붙 듯 점점 조이며 몰아붙인다. 달아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아가면서 점점 공포가 극에 달한다. 두 영화로 아리 애스터 감독은 더럽게 찝찝한 공포를 잘 활용하는 감독으로 남았다.

하지만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달랐다. 같이 본 소중한 사람은 현대 예술처럼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치게 집중하면서 공감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는데 동감한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진정으로 사랑받기를 바라는 보의 내면을 그린다.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렵게 해놨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풍경이 보의 내면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인셉션>의 다층 구조로 되어 있는 꿈을 생각하면 된다. 다만 <인셉션>이 다층 구조의 꿈을 수직으로 엮었다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다층 구조의 내면을 수평으로 엮었을 뿐이다.

이렇게 수평으로 엮인 내면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기반해 모성에 대한 증오와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다. 보의 엄마는 아빠의 존재를 지우고 이로 인해 보는 아빠를 떠올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엄마는 보가 절대적으로 자신에게 의존하길 바라며 집착한다. 여기서 재밌는 역전 현상이 발생하는 듯하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되 집착하는 엄마는 부성적 모성이 되어 보가 증오하는 대상이 되고 오혀려 엄마에 의해 가려지는 아빠는 모성적 부성이 되어 보가 보고싶은 대상이 된다.

수평으로 엮인 다층 구조의 내면과 비틀리고 역전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기반으로 한 모성에 대한 감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슬럼가의 광인과 노숙인들, 그레이스와 토니 부부, 숲의 사람들 등. 계속해서 변화하는 보의 내면은 극에 달한 불안 심리로 종잡을 수 없다. 즉, 이 세계는 보의 내면이지만 보가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이다.

문제는 이 불안이 모성에 의해 발생한 것 같기는 한데 어떤 사건으로 촉발되었는지 몰라 보와 마찬가지로 통제 불가능한 세계에 휩쓸려야 한다는 것이다. 불안에 의해 보는 극한 상황을 떠올리게 되며 닥쳐온 상황에서는 휩쓸리거나 도망칠 뿐이고 이는 관객도 마찬가지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보는 불안에 맞서지 못하고 끝내 자기 내면의 괴물에 잡아먹히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경기장에 관객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야 한다.

타인의 불안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인생 전반 혹은 특정 사건 혹은 특정 관계 등을 알고 있어도 간신히 인지한다고 말할 정도가 될 뿐이다. 하지만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관객을 보의 불안에 노출시킬 뿐 불안의 전후를 단편적으로만 알려준다. 감독 본인의 섹슈얼리티와 가정사가 얽혀있다고 알려져 보의 불안은 영화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으로까지 다층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그 의미를 풀어내 이해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그만큼 부모와 자식 관계는 불가해하다는 의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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