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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l 28. 2022

절대성이 널 보고 있으리라

미아리고개예술극장. 얇은 경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 현대 인간 사회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사유 체계이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세상에서는 이론상 자신의 언어를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개별 존재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의 언어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흔히 교통과 통신 기술의 발달로 물리적 거리가 좁아졌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 좁아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개별 존재자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가 함께 좁아진 것으로 즉, 개별 존재자 간 소통의 가능성과 실제 소통 역시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언제 어디서나 쉽게 발화할 수 있는 믿음만이 아니라 실제 환경까지 갖춰지면서 현대 인간 사회는 대존재발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문제는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절대성이 부정된 이후 수많은 개별 존재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언어로 너무 많이 말하기 시작한다. 너무 많은 언어의 범람은 곧 무엇도 명확한 것이 없다는 모호성과 허무주의를 낳는다. 누군가의 말은 너무나도 많은 해석이 가해지면서 실제 그 말의 의미가 존재했는지도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다른 사람이 듣기 좋은 말만 해주며 실제로 자신의 진심은 숨긴다. 진심을 드러내는 순간 수많은 이들의 언어로 난도질 당하며 오직 자신의 것인지도 모를 비틀린 심(心)만이 떠돌 뿐이다. 이렇듯 소통 가능성의 증가와 소통의 부재가 함께 공존하는 모순된 세계의 빈틈에서 무언가 우리를 보고 있다.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아주 오랜 이전부터 아주 오랜 이후까지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을 그 무언가는 인지할 수 있으나 이해할 수 없기에 그 시선이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으면 한다. 너무나 공포스럽기에.

연극 <얇은 경계>는 힐다와 나머지 세 인물 린다, 제리, 실비아의 대조 속에서 절대성의 공포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 대조가 아니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세계를 살아가는 린다, 제리, 실비아 곁에서 그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힐다의 모습 그 자체가 얇은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성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며 죽은 뒤에도 손녀곁에서 손녀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자신의 생각을 느끼고 말하도록 한 할머니로 인해 힐다는 무언가 인지할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고 느끼고 있다. 분명 볼 수 없는 할머니의 말들이 머리 뒤쪽 뇌 어딘가를 자극하며 느껴진다. 뭔지 모르지만 분명 느껴진 그 자극은 악마의 유혹이라 여기며 자기 딸을 망치지 말라며 할머니를 내쫓은 엄마가 원망스럽다. 집에서 쫓겨나신 뒤 얼마 안 가 돌아가신 할머니와 대화하기 위해 촛불을 켠 채 할머니와 했던 방식으로 할머니의 영혼을 느껴보려는 힐다는 이미 상대성과 절대성 사이 경계에 걸친, 절대성의 시선에 포착된 상태이다.


이와 달리 린다, 제리, 실비아는 상대성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관점과 해석을 내세우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관점과 해석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옳고 그름보다 자신의 관점과 해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기에.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말하는 영매 린다는 타인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며 타인을 위로해줄 뿐 다른 어떤 것도 의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치권의 유력 인사에게는 유권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줘야 권력을 쥘 수 있다고 말했으면서. 엄청난 재력을 갖고 린다를 후원하는 실비아는 자신에게 빈대처럼 붙어 있는 린다가 싫으면서도 위로가 되어주기에 린다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자신의 재력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싶다고 말하지만 당장 그것을 실천할 의지는 없는 것. 그저 200달러 짜리 와인잔을 2달러 짜리 와인잔으로 바꿀 뿐이다. 제리의 관점에서 실비아의 행동은 위선이고 오히려 세계를 더 혼란스럽게 하는 행동일 뿐이다. 실비아의 관점으로 산더미 같은 책이 쓰였다면 자신의 관점에서도 산더미 같은 책이 쓰였다.


한참을 서로의 관점, 해석, 행동을 비웃고 비난하는 세 인물의 모습을 힐다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세 인물과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경계가 쳐진 듯 아무도 힐다를 보지 않는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순수하게 빛나고 있지만 어딘가 공허한 두 눈이 세 인물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보고 있다. 서로 자신의 관점과 해석을 옹호하며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세 인물은 자신들의 존재만 신경쓰느라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보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 초점이 있지만 아무도 없는 곳을 초점 없이 바라보는 듯한 힐다의 두 눈은 뭔가를 봤으며 그 본 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할머니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린다 덕분에 힐다는 자신이 크리스마스 때 실종된 엄마와 있었던 일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분명하게 인지했음을 알고 있다. 세 인물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지만 얇은 경계가 있는 것처럼 지금도 어디선가 얇은 경계 너머에서 무언가 자신과 세 인물을 바라보고 있다.


힐다는 세 인물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대 너머 관객들을 바라본다. 세 인물이 관객을 바라봐도 관객이 아니라 다른 청중을 상정하고 말하는 듯하다면 힐다는 분명 관객을 보고 있다. 관객들 사이 어딘가. 혹은 어떤 관객 그 너머.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힐다의 눈은 관객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초점은 이 쪽을 향하는데 초점이 흩어져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이 있는가? 세 인물과 전혀 다른 눈으로 관객을 보는 힐다의 모습은 무대와 관객석 사이 존재하는 제 4의 벽이라는 경계를 흔들리게 한다. 보이지 않는 이 얇은 벽은 상대성과 절대성의 경계처럼 배우와 관객 사이를 가르고 있지만 흔들리면서 관객이 보고 있는 극이 무대 위의 극이 아니라 실제 현실처럼 느껴지게 한다. 눈으로 보고 있는 극이 극과 현실의 경계에 서는 순간 관객은 공포와 호기심을 느낀다. 자신이 지금 있는 공간의 현실감을 믿지 못하면서도 믿게 되는 애매함. 그 애매함 속에서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형언할 수 없다. 힐다의 눈을 피하려다가도 피하지 못한다. 빠져... 든다...


우웅


우웅


우웅


종된 엄마로부터 온 핸드폰 통화. 실비아의 비명으로 잠시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여전히 연극과 현실의 경계는 흔들리고 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존재감. 그 존재감을 타고 음산하지만 분명하게 들려오는 어떤 소리. 크리스마스 당시 엄마와 같이 있었다는 누군가. 크리스마스 이후 누군가와 함께 사라진 엄마. 오랫동안 엄마를 방치했다는 힐다의 죄책감 사이로 어떤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힐다의 경험이 공포와 호기심을 동시에 일으킨다. 엄마를 향한 죄책감 사이로 자신이 겪었던 일의 진실을 제대로 마주하고 싶다는 힐다의 욕망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그저 아직 설명할 수 있는 관점을 모를 뿐 분명 어딘가에는 힐다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관점이 있을 거라는 제리의 말은 허공으로 흩어진다. 상대성과 다원성에서 그저 자신의 존재를 말하기에 급급했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문다. 모두가 오래 전부터 봤고 보고 있었으며 보게 될 그 무엇을, 존재함을 느꼈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느낀 이상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쉽게 드러낼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옆에서 자신들을 보고 있을테니까.


자신이 경험한 것을 영매인 린다가 함께 알아주기를 바란 힐다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말을 넘어서 행동으로 드러낸다. 아무도 살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낡고 더러워진 힐다의 엄마 집으로 향하는 힐다의 눈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다. 그 단호함은 힐다의 엄마 집에서 인간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린다와 힐다가 함께 느낀 그 무엇의 존재와 같다. 그저 "그 자리에 존재했다."는 말 외에는 다른 설명이 불가하다. 인간의 세계와 다른 층에 저 너머의 세계가 존재한다던 린다의 말과 달리 저 너머의 세계라 불리는 세계는 바로 옆에서 항상 현존하고 있다. 순수하지만 공허해 보이는 힐다의 눈은 보고 싶지 않아 눈을 피하려고 해도 그 눈이 보고 있는 것을 궁금하게 해 결국 그 눈을 쳐다보고 눈이 바라보는 곳을 보게 한다. 신인지, 진리인지, 악마인지 알 수 없는 그 절대적인 무엇도 힐다의 눈처럼 공포와 함께 호기심을 자극하며 우리에게 손짓한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보지 않으려 해도 우리는 그 무엇을 찾고 있고 그 무엇은 우리를 보고 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는 재밌게도 심연에 대해서도 말한다.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상대성과 다원성의 세계에서 심연은 존재할 수 없다. '나'와 '너'가 이토록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지만 다름의 차이는 자신의 다름으로 수렴하는 개별 주체들 사이에서 무의미해진다. 주체들 사이 미세하게 존재하는 경계는 자신으로만 수렴하는 다름 속에서 오히려 더 분명해지고 공고해진다. 상대성과 다원성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잊혀지고 지워진 절대성이 필요하다. 상대성과 다원성의 세계로 덮여져 잊혀진 절대성은 항상 바로 옆에서 존재했다. 자신을 봐주길 기대하면서 상대성과 다원성의 세계와 절대성의 세계 사이 보이지 않는 얇은 경계에서 틈이 벌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저 존재한다는 설명 이외에 다른 어떤 설명도 불가능한 절대성은 분석도 해석도 필요없다. 그저 감각하고 인지하는 순간 절대성은 자신을 감각하고 인지한 이를 감싼다. 그것은 피하고 싶은 공포이면서도 피하고 싶지 않은 매혹이다. 바라볼수록 피하고 싶으면서도 계속 빠져드는 힐다의 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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