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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Aug 04. 2022

경계를 흩뜨리고 피어나는 꽃길

페미니즘 연극제. 240 245.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최근 어느 순간 길을 잃었다는 기분이 든다. 나이가 서른이나 되었음에도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고 느껴지며 이전에 가졌던 꿈은 더 이상 아무런 열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꿈을 포기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결국 그 꿈에 끝까지 가지 못해 죄책감이 든다. 그렇다고 새로운 꿈은 구체적이지도 않아서 앞으로 인생의 방향성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글을 쓰고 싶다고 하지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어중간하게 느껴진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기준에서 봤을 때 참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연극도, 글도, 사랑도, 취직도 모두 어중간 하거나 제대로 헤쳐나갈 재능이 없다고 느껴진다. 나이, 성별, 지위, 관계 등 주변을 둘러싼 채 켜켜이 쌓인 경계에서 자신의 존재가 점점 아무런 가치가 없게 느껴진다.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의 마지막 자존심이 괜찮다고 다독이면서도 뭐가 괜찮냐고 스스로의 폐부를 찌른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는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싶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주변을 둘러싼 채 켜켜이 쌓여 있는 이 세계의 경계들 사이사이에는 수많은 존재자들이 있다. 240과 245라는 신발 치수 사이에 242.5, 243.1, 244.005 등 수많은 치수들이 있다. 240과 245로 대표로 정해진 치수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가 지워진 치수들. 신발 치수만이 아니라 키, 혈액형, MBTI 등을 비롯해 성별, 인간 관계, 재산 등 한 인간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수많은 경계들이 부여된다. 자신에게 부여된 경계 내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설명하자니 어색하고 어렵다. 분명 세세하게 보면 조금씩 다른지만 어색하고 어렵기에 스스로도 경계에 대해서 무뎌지고 잊는다. 그 과정에서 무뎌지고 잊힌 경계들 덕에 아무런 문제 없이 세계에 스며들어 편안하게 살아간다. 중국 연태에서 소선대원이 되고자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고 한국인은 어려워하는 'z', 'c', 's' 발음 조차 완벽하게 구사해 중국어도 잘하던 은호는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

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하게만 느낀 주변의 경계가 서서히 눈에 보인다.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에, 연태에 살게 되었으므로 당연히 중국인이자 연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 은호에게 경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리 중국말을 잘하고 누구보다 앞장 서서 소선대원이 되고자 한다고 해도 은호 주변의 세계는 은호를 한국인이라 한다. 한국에서 교환 학생이 오면 자연스레 은호가 안내를 맡는다. 은호는 한국인이니까. 'z', 'c', 's' 발음까지 완벽한 중국어. 소선대원이 되고자 매고 있던 빨간 두건. 자신에게 익숙했던 세계가 하나 둘 어색하게 느껴진다. 속하고 싶었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세계가 된다. 촌스러워. 아무런 경계도 철책도 보이지 않던 바다를 건너올 때는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었음에도 경계를 넘은 줄도 잘 모르겠던데 왜 이제와서 경계와 철책이 느껴지는지. 이 세계가 아니라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속할 수 있을까?


2010년대 아이돌 노래처럼 한국 사회는 겉모습은 화려하고 세련됐다. 말도 섬세하고 다양하다.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됐으며 말도 섬세하고 다양한 한국 사회는 오히려 길을 잃기 쉽다. 휘황찬란한 겉모습은 눈을 혹하게 해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생각을 못하게 하며 섬세하고 다양한 말은 어떤 말로 자신을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저 상황따라 사람따라 넘어갈 수밖에 없다. 자신감 있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대신 긴장한 상태에서 쪼그라든 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상태가 된다. 중립이 뭔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중립이 되기 위해.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고 무해하기 위해. 다들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중립을 실천하는 가운데 서서히 주변에 경계만 더욱 쌓여간다. 아마추어 배우? 프로 배우? 예술인? 헤테로 여성? 바이 여성? 어디에 위치했고 지금은 어디에 있지? 어중간하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또 너무 튀면 그것도 안 된다고 한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 중립을 할 수 있게 되면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살아갈지 알 수 있을까?

그런 와중에 마음 속에서 욕망이 계속 꿈틀댄다. 프로 배우처럼 연기를 잘하고 싶다. 예술인으로 인정받고 싶다. 자신의 퀴어성을 드러내고 싶다. 누군가에게 빛이 되는 대배우가 되고 싶다. 드러내기엔 부끄러운 욕망이 간신히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중립(?)을 뚫고 나와 경계를 흩뜨리려고 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 헤테로와 바이의 경계. 예술인과 비예술인의 경계. 둘러싸고 짓누르는 경계를 부수고 흩뜨리는 욕망을 간신히 억누른다. 반작용처럼 죽음이 찾아온다. 둘러싸고 짓누르는 경계 속에서 무해하게 살려고 한 노력은 자신을 잃어버리게 했다. 원하던 것은 원치 않는다고 원치 않던 것은 원한다고 말하며 살아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지도 몰랐다. 죽고 나서야 보인다. 살면서 자신을 둘러싸고 짓누르는 경계가 허상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고 덜 촌스럽기 위해 살아왔던 경계인의 삶. 그저 자신에게 가장 편안한 걸음대로 걷고 멈추며 사는 것도 힘든 삶에서 뭘 그리 눈치를 보며 살았던지.


허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눈치를 보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세계에서 함께 살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그들과 살아가는 이상 계속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적어도 이제는 부끄럽다고 생각한, 촌스럽다고 생각한 것들을 다시 볼 수 있다. 남들에게 보이기 어렵다고 스스로도 보지 않으려 한 욕망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을 보며 원한다고 외칠 수 있다. 현재의 자신을 다잡으니 상상하지 않았던 미래의 자신을 바랄 수 있게 된다. "언젠간, 언젠가는 나도." 짓눌리고 힘겹게 살았던 과거의 자신을 위로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너를 사랑해." "죄송한 거 아니야. 그냥 가." 과거와 미래 사이 현재의 자신에게 평온이 찾아온다. 항상 조여오던 경계 대신 세계 그 자체가 보인다. 두려워할 것이 없다. 경계는 없으며 자신의 욕망으로 자신의 세계를 빚었다는 것을 안 이상 나아갈 길은 꽃길 뿐이다.

과거에서 쌓았던 것은 현재가 되고 다시 현재에 쌓는 것은 미래가 된다. 스스로가 걸어왔던 길은 바꿀 수 없으되 지금의 자신을 반추할 수 있는 거울이 될 것이며 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받아들일 때 두렵더라도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30. 남성. ISFP. 173.4. 천칭자리. B형. 글쓰기. 연극. 영화. 철학. 페미니즘. 대학원. 학창 시절의 왕따 경험. 약간의 바이(?). 옳음을 추구. 관종. 이밖에도 수많은 경계가 있을 것이며 그 경계 속에서 허우적대거나 짓눌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저 수많은 경계에 과거의 '나'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와중에도 결국 이루고 싶은 욕망을 따르며 지금 여기까지 살아왔기에 존재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수줍더라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원하는 일을 원하는 순간까지 하며 오래도록 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내가 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며 내 세계가 커졌으면 좋겠다. 경계에 눈치보며 살고 싶지 않다. 수많은 이별과 친구들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나아가고 싶다. 언젠간, 언젠간 나도." 당신과 함께 꽃길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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