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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진 May 11. 2018

세상을 글로 배운 자의 최후


 


즐겨 보던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바로 '현경의 글로 배웠어요' 편. 태권도 외에 다른 것은 다 글로 배워서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인데, 애교, 키스, 화장 모두 글로 배운 결과는 참담 그 자체. 그걸 보면서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세상을 글과 책으로 배운 편에 속한다. 특히 금전적인 것과 부동산에 특히 취약하다. 지금까지 혼자 살아본 적이 없는지라 집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적도 없다. 그저 책으로 배운 게 전부일 뿐. 내가 본 책에 따르면 새집을 구할 때 필수적으로 체크해야 할 리스트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집은 반드시 낮과 저녁 모두 방문해서 체크해볼 것, 그리고 주방과 화장실 물을 동시에 나오게 한 후 수압 체크할 것 등등. 집을 구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 중 일부분이지만, 이 모든 걸 책으로 배운 나는 이런 지엽적인 체크사항에 지나치게 몰두해서 다른 중요한 것을 놓치기도 한다. 실전 연습이 필요한 거다.


'책 속에 답이 있나니'를 불변의 진리로 여기고 살아온 지 어언 28년. 때때로 내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며 부족한 현실 감각을 채워보려 했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아도 별문제가 없었는데, 며칠 전 이런 내게 커다란 시련이 찾아왔다.


월요일 전체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원래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데, 외부에서 전화 올 일이 많은 시기인지라 전화를 받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이어진 전화.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검사를 사칭하는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깜빡 속았고, 내가 그동안 번 모든 돈을 날릴 뻔했다. 다행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이 말려줬기에 망정이지 나 혼자였다면 그냥 은행으로 달려갔을 거다. 검사와 경찰을 사칭하는 보이스피싱 사기 사건에 대한 기사를 수없이 읽어왔지만, 한순간에 휘몰아치듯 이어진, 그럴싸한 시나리오에 그만 넘어간 것이다. 사기인 걸 알고, 안도감을 느끼는 한편 속아 넘어간 내가 너무나도 한심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좀 그렇다. 분명 남을 의심하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사실 그게 맞는 건데…. 속인 그놈들이 나쁜 건데…. 이 일을 겪고 나니 내가 그동안 너무 순진하게 세상을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괜히 앞으로 이것저것 의심하게 될까 그게 좀 두려워지는 거다.


그냥 앞으로 의심 안 하고, 순진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지금도 살기가 팍팍한데, 이런 거까지 신경 쓰면서 살고 싶지는 않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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