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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라 Jul 12. 2023

집은 흔들렸지만 너는 흔들리지 않기를

지진이 난 튀르키예로 가다 (8)

튀르키예 지진구호를 위해 온지 일주일. 벌써 공식적인 일정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 날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 않고 우리가 머물렀던 초등학교 앞에 천막을 설치하고 그 지역 주민들을 환자로 받기로 했다. 아직 그곳을 떠나지 않고 천막을 치고 머무르는 사람들도 꽤 있어서, 우리가 의료구호활동으로 온 것을 알고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많은 환자들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마지막 하루를 쓰기로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모든 곳이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로 북적였기 때문에 오늘도 정신없는 하루가 될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한산해서 선생님들이 조금은 실망하시는 것 같았다. 처음 몇 시간은 조금 쉬면서 할 수 있어 편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사람이 오지 않자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내 다들 마지막날 하나님께서 휴식을 허락하시나보다 라고 말하며 그 시간을 즐거이 보내자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 내내 도착과 동시에 빠르게 장소들을 물색하고 이동하고, 정부 관련 기관/관계자들과 소통하며 최선의 의료활동이 될 수 있도록 바쁘게 뛰어다니셔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날도 '어린이 담당'이었다. 그 전날들에 비하면 환자들이 많지 않았기에 함께 오는 아이들도 많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적은 수의 아이들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대화도 하면서 정적인 활동들을 하는 게 훨씬 좋았다. 어제의 그 아이들이 떼거리로 몰려왔던 그곳에서 했던 일련의 활동들- 에코백 만들기, 왕관 만들기, 페이스페인팅 등-을 아이들에게 주면 조용하게 집중하는 모습들이 귀여웠다. 조용히 만들면서도 한 번씩 나한테 말을 걸어서 자신의 것을 봐달라고 하거나, 이것저것 질문하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어떤 한 아이는 계속 내 이름을 잊어버려서 "한국인 언니(koreli abla)"하고 불렀는데 그 귀여운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 속에 맴돈다.  


한산한 오전이 지나가고 점심을 다 먹은 뒤 해가 쨍쨍한 오후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리잡은 곳은 오전에는 그늘이었는데 오후에는 햇빛이 비추어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옮긴 곳은 인조로 된 잔디구장이었는데, 나중에 나와서 보니 내 크록스 바닥이 온통 그 초록색 인조잔디의 잔해들로 뒤덮여 있었다(제거가 어찌나 어려운지, 아직도 내 크록스에 남아있다).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자 농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누군가 가져온 미니골대로 공놀이도 했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왕관 만들기를 좋아했다. 참 어른의 눈으로 보면 별게 아닌 것들인데, 아이들은 작은 것 하나도 잘 눈여겨보면서 무언가를 얻었을 때 즐거워한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쓰는 돈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우리는 더 넓고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에서 얻는 만족은 줄어드니.


나는 그 날 사랑스러운 자매 아이들을 만났다. 사실 밤에 학교 숙소로 돌아와 그 아이들을 종종 마주쳤던 터라 얼굴과 이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아이들이 세 번 이상을 알려주었는데도 항상 기억하지 못하곤 했다. 그 아이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아일라 언니’하고 내 이름을 불러 주었는데 말이다. 왠만하면 기억을 하는데 아이들 이름이 유독 어려웠다. 둘은 친자매는 아니지만 사촌지간이라고 했다. 아이들의 엄마들이 자매지간이라고. 큰 아이는 ‘키파옛나스’ 작은 아이는 ‘으르막’이었다. 튀르키예에 몇 번 방문했지만 이런 이름은 처음이다. 어쩌면 튀르키예 출신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만 확실하지 않다. 두 아이는 k-pop을 좋아한다면서 먼저 내게 관심을 보여왔다. ‘블랙핑크’ 중에서 누가 제일 좋냐고도 묻는다. 응? 누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하지만 이렇게 반응하면 항상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하면서 놀람과 원망이 섞인 눈초리를 받기 때문에 주워들은 대로 대답한다. 아이들은 만족스러워한다. 귀엽다.


아이들 주위에는 아이들의 할머니와 삼촌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지내는 일주일 동안 키파옛나스와 으르막의 부모님은 볼 수 없었다. 할머니와 삼촌이 아이들을 케어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소아과 의사선생님께서 아이들의 할머니를 진료하셨는데, 할머니가 파킨슨 초기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하시며 너무 안타깝다고 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의 딸들이며 키파옛나스와 으르막의 어머니가 지진으로 사고를 당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을 들을 때 마음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실이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아이들과 할머니가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동네 주민들이 다 떠나가 버린 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사정도 있을 거다. 밤에 지진을 경험했기에 낮 동안에 잠깐 들어가더라도 금방 밖에 나와야 하고, 잠은 천막 안에서 자야만 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나를 보며 웃는다. 작은 것들에 즐거워하고 사진을 찍자며 다가온다. 아직은 이 엄청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자라지 않은 것이 불행일까 다행일까. 아니면 자신이 무엇을 겪었고 그것이 남은 삶 동안 자신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될지 다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떻든 간에, 지진이 자신의 집과 물건들과 심지어는 사랑하는 가족까지 흔들어 놓았을지언정 그들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사랑을 갖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지진을 겪은 사람도 겪지 않은 사람도 인생에서 수많은 진동과 격동을 경험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싶다. 그것이 우리를 계속 살게 하는 거라고..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하지만 얼마간은 잊고, 얼마간은 껴안고 살아가게 해주는 거라고.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여기 앞으로 자라나고 살아나갈 아이들에게도 있기를 기도하게 된다.


사랑스러웠던 으르막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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