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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Aug 19. 2024

시댁 단톡방만 나왔을 뿐인데

밀려드는 복잡한 감정은 무엇

8.15 광복절. 대한민국만 광복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2024년 8월 15일, 나 또한 광복을 맞았으니. 만 8년 만에 시댁단톡방에서 퇴장할 수 있게 되었다.(단톡방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남편과 시부모님은 계속 있어야 할 것 같다고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지난날 그렇게 울고불고해 가며 나오고 싶다던 단톡방이었는데 나올 수 있게 되고 나니 시원함 보다는 섭섭함이 아주 조금 더 큰,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삐딱이 같은 마음.) 시댁단톡방만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혀 체한 것처럼 8년째 살아왔던 나는 해방감과 소외감, 공허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카톡 채팅방을 볼 때마다 머리 한쪽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없어진 대신 나만 떨어져 나온 듯한 외로움이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안다. 섭섭함과 외로움, 공허함은 잠깐이요. 해방감과 자유는 영원하리.


단톡방이 정리되기 전, 지난 수요일에 그림책 모임에서 시어머니의 방문 이야기(지난 화)와 함께 이번에는 기필코 단톡방을 나오리라 다짐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시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한참 털어놓는 나에게 호호선생님이 물어보셨다.


"그레이스, 남편은 뭐라고 해요?"

"남편은 어머니와 제 사이에서 완벽한 저의 편이고 제가 하겠다는 걸 수용해 주는 편이에요. 이번 지원사업 워크숍 핑계로 외박하는 것도 허락했어요."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선생님도 고부갈등에 대해 할 말이 많으신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지나가고 있는 이 터널을 다 지나온 선배가 하는 조언은 내 귀와 마음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남편이 그레이스의 편을 든다고 해도 남편은 뼛속까지 어머니의 아들임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남편이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 뿌리를 꺾는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선생님의 이 두 마디가 내 마음속에 콕 박혀 며칠 동안이나 머릿속과 온몸을 맴돌았다. 나무가 스스로 뿌리를 꺾는 일이 어떤 일인지 몇 번이고 떠올랐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고 내가 사랑하는 그가 스스로 뿌리를 꺾도록 강요한 내 모습에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그렇다. 남편은 시아버지 이야기보다 시어머니 이야기에 더 힘들어했다. 사람은 본디 이성의 부모를 보고 배운다고 들었다. 남편은 여러 면에서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는 어머니를. 내가 어머니가 잘못되었고 이상하다고 할 때마다 남편은 내가 맞고 시어머니가 틀렸다며 옳지 못한 행동을 했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말한 뒤, 많이 지쳐 보였던 남편의 모습이,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난 지금에서야 조금씩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시부모님이 오시기 일주일 전부터 너무 신경을 쓴 탓일까. 신경성 허리통증은 점점 심해졌고 몸과 마음은 같이 간다고 했던가 허리통증이 심해질수록 마음은 점점 위축되었고 시부모님과 만날 용기가 점점 줄어들었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풍선처럼 커졌다. 시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는 일, 남편이 출근하고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스트레스에 짓눌린 허리를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아마도 쌓인 감정과 경험 때문이리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여도 소용이 없었다. 시부모님을 만나는 일은 특히나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나 홀로 함께하는 일은 쓰라린 상처를 소금물에 담그는 것처럼 느껴졌고 생각만 해도 아파서 비명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 나는 겁쟁이에 소심하고 미리 걱정하는 병도 있고 예민하고 회복탄력성도 낮아 회복되는데 오래 걸린다. 어쩌겠는가. 그렇게 생겼는 것을.


나는 시부모님께 지원사업 회의를 핑계 대고 외박을 했다. 다니언니네 집에서 놀고먹고 잤다. 새벽 3시까지 수다를 떨었다. 언니는 목이 아프다고 했다.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하고 우리의 감정을 나누는 일, 서로를 다독이는 시간이 나에게는 한 뼘 훌쩍 크는 성장의 시간이었다. 언니와 함께 과거를 더듬으며, 육아에 치여 잊고 지냈던 우리의 찬란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머리에 숨통을 뚫을 수 있었다.


16일, 다음 날은 제주항 근처 호텔에서 주무시겠다는 시부모님을 따라 아이와 남편도 함께 자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집에 가서 혼자 멍하니 있을 생각을 하니 겁도 나고 복잡한 감정 때문에 섣불리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이해한다며 받아주고 안아준 다니언니. 2박 3일을 언니집에서 지냈다. 그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언니에게 의지하며 시간을 보냈다. 참 고마운 사람. 어머니, 아버지가 가시는 날, 얼굴이라도 비추지 않으면 가시고 나서도 너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가는 것이 그리 신나는 일은 아니지만 내 마음 편하자고 배웅은 하러 가야겠다는 나에게 언니는 말했다.


“갈 때 작은 거라도 사서 어머니 아버지 드려.”


언니가 아니었으면 생각도 못했을 일. 가는 길에 선물가게에 들어가 어머니 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골랐다. 형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신발과 머리핀도 골랐다. 남편의 선배가 왔을 때도 작은 선물을 챙긴 나였는데 시부모님께는 챙기지 않는 나를 보면 남편도 사람인데 속으로 얼마나 실망할까 싶으면서 언니에게 고마웠다. (좋은 사람, 성숙한 사람 옆에 있어야 하는 이유. 나 또한 언니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톡방을 나온 후, 한 발 뒤로 물러난 나의 시댁에 대한 감정에는 작은 틈이 생겼고, 확실히 그전에는 내 상처에 갇혀 볼 수 없었던 남편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 여유, 마음껏 누려야지. 시간이 흘러 마음이 많이 정리가 되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만큼 단단해지면 안부 전화도 가-끔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멀었지만.



이미지 출처: depositphot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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