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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l 04. 2024

영업종료를 희망합니다.

답정너 엄마의 고민상담소

약속을 잘 지키는 홍양이 안 온 지 5일째다. 임신여부보다 다른 이상이 있는지 궁금해서 산부인과에 갔다. 다행히 아무 이상은 없었고 이틀 뒤까지 홍양이 오지 않으면 임신테스트기를 해보라고 하시고는 진료는 끝이 났다. 별일 아니었다. 어제는 엄마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제 지긋지긋했던 6월이 지났고 새로운 7월이 시작되었으니 조금씩 멀어지고 싶었다. 건강한 거리를 두고자 그랬다. 그러나 하루도 못 가 엄마는 전화를 걸어왔다. 병원을 갔다가 남편의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깐의 데이트를 하는 중이었는 데 방해받고 싶지 않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로 메시지가 왔다. "바쁜가 보구나.", "점심은 먹었니? " 시간차를 두고 온 두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이제는 내 걱정도 할 여유가 생긴 건가 싶어 콜백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 엄마, 나 산부인과 다녀오느라. 이제 집 가."

"산부인과를 왜 갔니? "

"생리예정일이 지났는 데 안 해서. 그리고 안 간 지 오래된 것 같아서 겸사겸사 다녀왔어. "

"..... 그래. 병원에서는 뭐래? "

"응. 별 이상 없대. "

"임신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

"아직은 확실하지 않고 이틀뒤에 테스트기 해보래. "

"......"


한동안 말이 없는 엄마가 나는 당황스러웠다. 마치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것처럼 복잡해 보였다. 분명 이건 내 일인데, 왜 엄마는 항상 앞서 걱정을 하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임신이라도 돼서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역할중독자 엄마는 본인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그런 엄마를 알기에 얼른 엄마의 사고회로를 끊어버렸다.

"엄마, 이제는 경험자라서 첫째 때처럼 엄마 도움 받지 않아도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

"나이터울 많이 나면 다 새로워서 힘들어. 당연하지. 엄마 이제 늙어서 못해."

맞는 말이지만 서운함에 코가 시큼했다.

"아, 그럼 그럼. 당연하지. 엄마는 이제 쉬셔야지. 근데 엄마 목소리에 힘이 없네."

"아니. 그냥. 할머니 모시고 계신 게 너무 힘드네. "


아휴. 그럼 그렇지. 내가 걱정되거나 나의 근황을 살피기보다는 항상 자신의 고민이나 남에게 하면 흉이 된다며 풀어놓는 하소연 같은 용건이 있어야 전화를 거는 엄마였기에 이제는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근황과 생활, 기분에 대한 즐겁고 가볍고 사소한 대화를 하지 못하는 엄마를 이제는 그냥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 데 아니었나 보다. 엄마는 우리 딸 사랑한다는 말과 사소하고 다정한 대화들 대신 택배를 보낸다. 사실 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들이긴 하나 필요한 물건들은 아니다. 그게 엄마의 사랑고백이라고 얼마 전 다섯 번째 택배를 받고 서야 깨달았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고민과 하소연은 너무도 잘 털어놓는다. 그도 그럴 것이 고민과 하소연은 바다 건너 있는 딸에게 택배처럼 우회해서 보낼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민과 하소연은 잘못이 없다. 그 빈도와 방식이 다소 일방적이라 문제다. 마치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된 듯 언제부터인가 엄마를 진정시키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엄마의 결핍을 채워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 집 근처 심리상담센터에 직접 전화로 예약을 하고 선결제를 해 전문상담가 선생님께 가서 이야기해 보라고 했던 적이 있다. 엄마는 돈이 아까워서 갔다고 한다. 자기가 남편 없이 아이 둘을 열심히 키워 시집 장가보낸 썰만 열심히 풀다 왔을게 뻔했다. 자기 PR이 거의 국가유공자 훈장이라도 드려야 할 정도다. 다녀와서 어땠냐는 물음에 자신은 상담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정의 내렸고 다시는 돈 내고 예약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나의 상담사 역할을 내려놓기는 대실패를 했다. 얼마 전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돈도 안내도 되는 상담 선생님 같은 딸이 있어 좋고 편해. “라고.

나는 왜 그 말이 기분 나쁘고 불편한지 아직도 모르겠다.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게 된 지 일 년 반이 넘어간다. 그간에 힘들다는 곡소리는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답정너 엄마가 듣고 싶은 말은 한결같았다. "대단하다.", "요즘 그렇게 하는 집 없다. 할머니는 복 받은 거다. " 등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것에 대한 인정과 칭찬이 엄마가 다시 할머니를 돌보게 하는 일종의 진통제인듯했다. 그것마저 지겨워진 나는 저번에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정 그렇게까지 본인이 힘들다면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자주 면회를 가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엄마는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했다.


"너도 그럼 나 요양원에 보낼 거니?"


순간 얼음이 됐다. 어떻게 대화가 그렇게 흘러가지? 순발력을 발휘했고 위기 아닌 위기를 모면했다.


“엄마,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고 그동안 엄마가 못해본 게 얼마나 많은데 벌써 앓아누울 생각을 하는 거야? 여행도 다니고 행복하고 즐겁게 지낼 생각을 하셔야지.”


전화를 끊고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외갓집은 3남 2녀로 5남매인데 큰외삼촌, 엄마, 둘째 삼촌, 막내삼촌, 이모 순이다. 할머니는 큰아들에게 늘 의지를 해왔다. 할머니는 늘 늙으면 큰아들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삼억이라는 빚을 다 갚고는 식당을 그만두고 큰 외삼촌댁으로 들어가셨다. 그때 할머니 나이가 일흔셋이셨다. 고혈압과 부정맥 등 지병은 있으셨지만 대체로 활동이 가능한 상태셨다. 큰외삼촌은 할머니를 모시는 대가로 막내삼촌에게 집과 매달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엄마는 큰 외숙모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나 때문이라기보다는 둘 사이에 신경전이 있었고 그 신경전의 피해자가 나였던 셈이다. 엄마는 아무래도 큰 외숙모가 사이가 좋지 않다 보니 자주 가기가 껄끄러워 할머니를 뵈러 두 번 갈 거 한 번 가고 했단다.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는 방치되고 있었고 할머니를 뵙고 오면 엄마의 걱정은 깊어만 갔다. 하루는 큰 외숙모가 엄마를 부르더니 "네 엄마니까 네가 모셔라."라는 이야기를 했고 “나도 과부 돼서 대접받고 살고 싶다. 나 과부 좀 되게 당신 좀 죽어라.”는 말에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경험한 엄마는 결국 몇십 년간 참아온 감정들이 폭발하고 말았다. 이처럼 큰 외숙모는 한결같이 사람을 열받게 하고 기분을 더럽게 하는 은사가 있다. 막말이나 상황에 맞지 않는 유치한 대응을 잘하는 치트키가 있어 싸움은 더 진흙탕 싸움이 되고 말았다. 당시 이모할머니와 큰외삼촌이 말렸다고 하는데, 큰외삼촌은 큰 외숙모 편을 든거지 말린 건 아니었다고 본다. 예순 넘은 남자의 생존전략.


그 이후 누구도 엄마에게 할머니를 모시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할머니가 큰 외삼촌댁에서 응급실로 실려가신 틈을 타 할머니를 엄마집으로 빼돌렸다고 했다. 그래놓고 엄마는 항상 “그래. 내 엄마니까 내가 모신다. “ 라며 분노를 뿜어 내고 있었다. 늘 엄마 자신보다 큰외삼촌을 먼저 생각하던 할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밀려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의 요양보호사역할을 하고 있다니. 솔직히 열받는 일이긴 하다. 할머니를 모시는 일 년간 엄마는 굉장히 위태롭고 불안정해 보였다. 늘 화가 나 있었고 말에 가시가 박혀 있어서 대화하기가 참 어려웠고 사고자체가 비관적이고 공격적이라 대하기가 참 힘들었다. 할머니는 주상복합아파트 50층이었던 큰 외삼촌네에서 화장실 가다가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졌는데 수술을 하고 큰 외숙모가 귀찮다는 핑계로 제때 재활을 받지 않아 그대로 눕게 되셨다고 한다. 엄마가 모시게 되었을 때 병원에 알아보니 넘어진 게 뇌경색 때문이었다고 했다. 큰 외숙모가 할머니를 세심히 돌보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엄마가 집으로 처음 모시고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할머니는 큰 아들 내외에 대해 욕을 하고 분노를 표출하시곤 하는데 엄마는 버림받은 배신감에 그러신 것 같다고 했다. 배신감이면 믿었던 마음이 있었다는 건데 무엇을 믿었을까. 늙은 자신을 잘 봉양하는 큰 아들 내외의 모습이었을까. 나는 잘 모르지만 큰 아들 내외라는 이유만으로 매일 가족 모임에서 치켜세워주고 큰 외숙모가 잘못해도 편들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실직자 큰 아들을 막내아들 회사에 꽂아준 것까지. 아마도 이 모든 것이 할머니 자신의 노후 보장을 위한 큰 그림이었으리라.


엄마와 할머니는 참 많이 닮았다. 며칠 전 엄마와 대화하던 중에 엄마가 우리 남매를 모두 결혼시키고 서울까지 오가며 오빠네와 우리 집 중에서 어느 가족에 속해서 자신의 노후를 기대어 살아야 할지를 재고 따졌던 것을 알게 됐다. 뭔가 명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것조차도 계산적인 엄마가 너무도 피곤하다. 내가 엄마입장이 되어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려니. 그래도 딸에게 그 말을 직접 한다는 게 놀랍긴 하다.


오늘의 하소연은 할머니를 그만 모시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자신과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였다. 결국 연료가 떨어져 인정과 칭찬, 위로가 필요하다는 신호다. 얼마 전 뵙고 온 할머니는 언제든 돌아가셨다고 해도 놀랍지는 않은 상태이다. 최근에는 욕창까지 생기셔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계신 모습이 안타깝고 엄마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수발을 드는 것도 모두 힘들어서 요양원에 보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이랄까. 효녀는 아닌데 자신의 마음이 그렇단다. 결국 돌아가셨을 때 후회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지 않을까. 난 아직 거기까지 살아보지 못했으므로 잘 모르겠다. 그러면 하루빨리 할머니가 편하게 하늘나라를 가셨으면 좋겠냐고 하니, 옆에서 안 볼 때는 하루만 더 사셨으면 싶었는데 요즘은 소리 지르시면서 힘들어하셔서 안쓰럽고 편안하게 주무시다 하늘나라 가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를 비추어 볼 때 외할머니도 인정욕구가 대단한 분 같다. 자식들에게 해준 것에 대한 인정과 칭찬, 감사의 표현을 들어야겠는 할머니의 그 결핍 때문에 세상과의 끈을  지독하게도 못 놓고 계신 것 같았다. 외삼촌외숙모들과 이모, 엄마가 구체적으로 감사함을 말로 표현하시고 크면서 속상하게 해 드려 죄송했던 마음도 표현하셔서 할머니의 인정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편하게 가실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식들이 그런 말을 못 한 채로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후회하며 살까 봐 끈질기게도 견디시는 게 엄마 마음이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바로 막내삼촌과 이모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엄마는 전화를 끊었다.


언제쯤 나는 이 역할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하씨. 아빠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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