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선의 추억

by 보물

달리기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다.

이 정도 시간이면 달리는 게 힘들지 않을 법도 한데 매일 아침마다 고민하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은 쉴까?

어제 많이 뛰었는데 오늘도 뛰면 무릎에 부담되는 거 아닐까?

누가 보면 션만큼 뛰는 줄 알겠다.

사실 매일 달리러 가기 전엔 왜 이러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었다.

막상 달리기 시작하면 기분도 상쾌해지고 달리고 나면 내가 꽤 괜찮은 인간이 된 것처럼 뿌듯한데 말이다.

하지만 달리러 나가기까지 넘어야 할 문턱이 매번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뛰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 스스로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줄 필요는 있겠다 싶다.

나는 아침을 먹기 전에 공복으로 달린다. 달리고 난 뒤 나는 아이가 아침에 먹고 남긴 음식으로 먹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메뉴로 맛있게 식사를 한다.

단출하지만 나만을 위해 차린 아침식사가 주는 행복감이 꽤 크다.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어쩌면 나는 먹기 위해 달리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목표한 거리를 다 달리고 나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승선 테이프를 처음으로 끊고 들어오는 마라토너의 기분을 1% 정도는 알겠는 기분이랄까?


국민학교 6학년 마지막 운동회날이었다.

운동회 때 달리기는 필수종목이었다. 한 줄에 8명이 출발선에서 50미터 정도 달려 결승선에 들어가면 선생님께서 1,2,3등으로 들어온 아이들 손등에 진한 파란색 잉크가 선명하게 도장을 찍어주셨다. 당연히 나는 한 번도 도장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왜냐면 매번 8등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날은 미션 달리기였다.

다같이 달려가서 중간에 놓인 미션종이를 집어 들고 미션을 수행해서 결승선에 빨리 들어오는 게임이었다.

달리기도 느린 데다 미션까지 수행해야 하니 내겐 불리해도 한참 불리한 게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있는 힘껏 달려가 미션종이를 집어들 무렵엔 내 앞에 달려간 일곱 명의 아이들은 이미 종이를 들고 어디론가 다 사라진 뒤였다.

미션은 대충 이랬다.


[교장선생님 손잡고 결승선에 들어오기]

[1학년 학생을 찾아 같이 들어오기]

[교감선생님께 인사하고 사인 받아오기]


나는 두 번 접힌 미션종이를 펼쳤다.

[체육선생님을 찾아 함께 결승선에 들어오기]

내가 종이에서 눈을 들어 주위를 살피던 순간 출발선에 계시던 체육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촉이 좋으셨던 것일까? 내가 그쪽으로 뛰자마자 선생님께서 냅다 달려 나오시더니 나를 거의 옆구리에 끼다시피 하시고서는 결승선으로 내달리셨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날았다. 나는 체육선생님의 발을 빌려 1등으로 결승선에 들어왔다.

내 생애 최초로 손등에 1등 도장이 찍혔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보고 또 보았다. 그날 받은 공책 3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온전한 네 실력이었니?라고 물으면 당연히 그건 아니다.

누군가는 운이 좋았다. 미션종이를 잘 뽑은 거지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맞다. 그날 나는 운이 좋았다.

하지만 달리기에 대해서만큼은 온통 부정적인 기억밖에 없던 내게도 떠올리면 기분 좋은 달리기의 추억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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