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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스 Jan 12. 2019

나의 개인적인 페미니즘 1

고등학교 때였다. 점심은 교내 1층에 위치한 급식 실에서 줄을 서서 식판에 배급받아먹었는데, 주로 반찬은 학생 한 명당 개수가 정해져 있어 더 달라고 해도 절대 더 주지 않으셨다. 나를 포함 소위 한 덩치 한다 싶은 여학생들이 많았던 우리 반은 체육대회 줄다리기에서 너무나도 쉽게 1등을 차지할 만큼 다들 건강했는데, 심지어 마른 친구들도 쉬는 시간마다 매점에 갈 정도로 먹성이 좋았다. 그런 우리가 어느 날 남학생들이 자신들의 식판에 맛있는 반찬을 산처럼 쌓아서 지나가는 광경을 목격한 후 격분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우리는 급식 아주머니들께 항의를 했지만, 남은 반찬이라 마지막 학생들에게 다 퍼준 것뿐이라는 답변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남학생들이니 많이 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무슨 여학생들이 먹는 거 가지고 그러냐? 는 답변만 가슴에 강렬하게 꽂혔다. '우리도 같은 금액의 급식비를 내는데 왜 남학생들만 남은 반찬을 몰아주냐, 이건 부당하다.'며 교실에 모여 앉아 화를 내던 것이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첫 성차별이다.     


고등학생이 다 되어서야 처음으로 성차별적인 발언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된 이유는 내가 자라온 환경에 있었다.

나는 외동딸인 데다 친가와 외가 모두 남자인 막내 사촌동생과 7-8년 정도 터울이 있는지라, 자라면서 크게 딸이라서, 여자라서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첫 월경을 시작했을 때, 친척들이 모여서 케이크에 촛불을 끄며 작은 축하파티를 열어주셨고, 그 자리에 있던 친척 오빠는 "왜 쟤는 생일도 아닌데 케이크 불을 끄냐"며 삐쳐 있었다. 엄마는 여성스러운 레이스가 달린 옷보다는 어두운 색의 남녀 구분이 없는 옷을 주로 입히셨고, 아빠는  나를 마치 아들 마냥 대하셔서 남녀 성 역할에 대한 이해도 사실은 적었던 듯싶다. 

나를 임신하셨을 때, 점쟁이가 이 아이는 남녀 성 역할이 바뀌어서 태어날 거라고 했다는데, 내가 그렇게 타고난 건지 아니면 자라면서 주변의 환경 탓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물론 어릴 때 동생 낳아달라고 시키는 어른들 때문에 몇 번 생각 없이 엄마를 졸랐다가 호되게 혼난 적도 있고, 아빠가 맏아들이니 엄마가 아들을 낳았어야 한다는 식의 말도 들은 적이 있지만 정작 부모님이 그런 식의 표현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처럼 외동인 친구가 어릴 적 명절날 어른들이 차례 상에 절을 못하게 해서 상을 엎어버렸더니 의외로 혼나지 않고, 할아버지가 나서서 "누가 얘 절을 못하게 했냐?" 고 감싸 주시며 오히려 과감한 행동에 칭찬 아닌 칭찬을 받았었다는 일화를 듣고 '역시 아직도 그런 구시대적 발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내 외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제사상이 아닌 명절 차례 상에 한 번도 절을 해 본 적이 없다. 사실 모두 내게 함께 절을 하자고 했지만, 할머니도 엄마도 음식 준비 후 제사를 지낼 때는 한편에 앉아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차례가 끝나기를 기다리기에 그곳이 더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자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남자들은 차례를 위한 다른 준비와 밤을 까고, 이후 차례를 지내는 것은 내가 생각했을 때 남녀 차별이 아닌 단순한 역할분담이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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