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두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두 편의 작품은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 어떤 독자에게나 큰 울림을 주겠지만, 특히 청소년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라 확신한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책장을 덮자마자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책이다. 그리고 나의 성장기에 이 책을 읽었다면 당시 흔들리는 내면을 다지는 데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쉬움도 들었다.
주인공 한스가 마을 사람들의 온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주정부시험을 준비하고 응시하는 장면, 시험을 앞두고 느끼는 불안감과 시험 후 자연을 만끽하며 느끼는 해방감까지. 내가 걸어온 길과 다르지 않아 공감이 많이 되었다.
주정부시험에 통과한 그가 수도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 첫날의 풍경과 느낌도 인상적이었다. 누구나 처음 새로운 곳에 놓이게 되면 그 낯섦에서 오는 설렘, 불안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한스가 기숙사 방을 배정받아 새로운 교우들을 보고 한명 한명 바라보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장면도, 내가 십대에 거쳐 온 풍경 중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수도원에서 만난 한스의 친구 ‘하일너’. 한스와 전혀 다른 기질의 문학 소년이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다. 한스는 하일너와 교류하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도 가져보게 된다. 자유분방한 사고와 생활로 다른 이들의 질타를 받는 하일너와 잠시 거리를 두면서, 그에게 죄책감도 느낀다. 다시 그와의 우정을 회복하지만, 어느 날 하일너가 떠남으로써 그 우정은 다시 이어갈 수 없다.
그 일이 있은 후, 한스는 수도원에서의 생활을 더 이상 해나갈 수 없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한스가 느끼는 절망감, 불안감이 죽음을 갈망하며 목을 매달 나뭇가지를 찾아 헤매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엠마라는 소녀와의 사랑으로 잠시 돌파구를 찾아내는 듯 하지만 그 사랑 또한 떠나가면서 다시 우울감에 휩싸인다. 기계공으로의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는 즈음, 그는 더 이상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없게 된다.
한스가 경험하는 우정, 슬픔, 절망, 좌절, 희망, 분노가 소설 속에서 솔직하게 그려져 있어, 읽는 내내 가슴이 벅차올랐고 슬펐다. 누구나 경험했을 어린 시절 내면의 성장통을 이토록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한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을 의미하는 ‘수레바퀴’가 한스가 살았던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많은 아이들이 그 수레바퀴 아래서 자신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아이들을 위한 진정한 교육이 무엇일까, 자칫하면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되는 아이들을 이 시대에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 "그래, 좋아, 한스. 그렇다고 너무 지칠 정도로 하지는 말게. 잘못하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되거든."
- 그것은 자부심, 도취, 승리감으로 가득 찬 꿈처럼 기이한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그는 학교나 시험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보다 지고한 존재영역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그 초월적 영역을 동경했다.
- 그들은 한스의 고집불통과 태만한 성격을 강제로라도 고쳐 올바른 길로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스에게 동정심을 느꼈던 복습교사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소년의 야윈 얼굴과 당혹해하는 미소 뒤에 한 영혼이 괴로워하며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으며, 물에 빠진 영혼이 공포와 절망 속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의 야만적 명예심이 이 연약한 생명을 죽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스는 왜 가장 예민하고 조심해야 할 시기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해야만 했을까? 무엇 때문에 어른들은 한스에게서 토끼를 뺏고, 학교 친구들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게 하고, 낚시질을 하거나 한가로이 산책하는 것을 금지시켰을까? 왜 그렇게 녹초가 될 정도로 공부하도록 부추기는 공허하고도 천박한 명예심을 주입시켰을까? 무엇 때문에 시험이 끝난 다음에 응당 누려야 할 방학까지도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걸까?
- 한스는 늘 혼자였다. 하지만 그의 감정의 지평선에는 우정이라는 나라가 동경에 찬 색깔로 강력하게 떠올랐고, 그는 그 나라로 가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이 발목을 잡았다.
- 그는 수줍음 많은 소녀처럼 가만히 앉아 자기보다 힘이 세고 용기 있는 사람이 찾아와 자신을 데리고 가 주기를, 그가 자신을 억지로라도 데려가 행복을 안겨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구절들을 소설의 맥락 속에서 만나보고 싶다면 꼭 책을 구해서 읽어 보기를 바란다. 책 속에서 위로받고 싶은 한 명의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할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데미안>이다. 주인공 싱클레어의 유년시절부터 성년이 될 때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부모의 슬하로 대변되는 밝은 세계에 싱클레어의 거짓말과 크로머와의 틀어진 관계로 인해 균열이 생기고, 그의 내면은 혼돈에 휩싸인다.
<사나운 비바람이 내 머리 위로 몰려들고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어린애 취급이나 당하고 있다니!......그것은 아버지의 존엄성을 가른 최초의 균열이었으며, 내 어린 시절을 떠받치던 기둥들,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무너뜨려야 하는 기둥들을 가른 최초의 칼자국이었다. 우리 운명의 본질적이고 내밀한 항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 데미안과의 만남으로 그는 크로머에게서 빠져 나온다. 그리고 데미안과의 대화를 통해 세계의 전체를 바라보게 되고,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여기서 세계의 전체란, 세계는 밝은 세계뿐 아니라 어두운 세계로도 이루어져있다는 통찰을 의미한다. 소설 속에서 그들이 지향하는 신은 아브락사스, 선함만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악함, 악마적 본성마저 아우르는 것과 상통한다.
또한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잠시 멀어지고 김나지움에 진학하게 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게 되면서 다시 변화한다.
<그러다 그것은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느낌이 서서히 들었다. 그림이 나를 닮은 것은 아니었다.그리고 닮을 리도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삶을 이루는 것이었고, 나의 내면, 나의 운명 혹은 나의 악령이었다. 내게 언젠가 다시 친구가 생긴다면 그런 모습일 것이다. 내게 언젠가 사랑하는 여인이 생긴다면 그런 모습일 것이었다. 나의 삶과 죽음이 그럴 것이었다. 그것은 내 운명의 선율이었고 리듬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데미안이 보낸 쪽지.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또한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 교류하며 세계와 자신에 대해 인식하면서 허물을 벗고 알껍데기를 깨려 한다. <각성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을 확고하게 다지고 결국 어디에 이르든지 간에 자신만의 길을 계속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그 한 가지 말고 다른 의무는 결코, 결코, 결코 없었다.>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H대학에 진학한 그. <모든 게 틀에 박힌 듯 천편일률적이었으며, 너도나도 모두들 똑같이 행동했다. 소년 같은 얼굴을 붉게 상기시킨 명랑함은 우울하게도 인스턴트 제품처럼 공허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자유로웠고 온종일 나 자신을 우해 살았다> 이렇게 지내던 중 우연히 데미안과 재회하게 되고, 데미안의 집에 가 그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과 만난다.
<생전 처음으로 외부 세계가 내 내면 세계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이제 영혼의 축제 날이고 이제 살아야 할 보람이 있다. 그 어떤 집도 쇼윈도도 골목길의 얼굴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모든 게 원래 있어야 하는 그대로였지만, 평범하고 익숙한 것의 공허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행복을 포기하고 자유를 택한 사람도 세상이 환히 빛나는 것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내적 전율을 맛볼 수 있음을 깨닫고 황홀했다.>
그러던 중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고, 데미안와 싱클레어는 참전하게 되는데 전쟁 중 부상을 입고 누워 있던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재회한다. 그가 만난 것이 상상 속의 데미안이었는지, 실제 데미안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자신 안으로 침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각인시키며 떠난다.
소설의 정수인 마지막 문장. <그 후로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따금 열쇠를 찾아서 나 자신 안으로 침잠하면, 운명의 형상들이 어두운 거울 속에서 잠들어 있는 곳으로 완전히 침잠하면, 검은 거울 위로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나의 친구이면서 인도자인 그와 똑같은 모습이.>
이 소설은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창작되었다.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후 헤세는 이 작품을 집필하고 소설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통제할 수 없이 흘러가는 외부 세계의 처참함 속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은 자신 안으로 침잠하여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는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완벽한 선만을 추구하는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며, 선과 악, 밝음과 어둠 모두를 아우르는 존재라는 위로의 손길을 내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예전에 읽고 십년이 넘어서 다시 읽으니, 세계 속에서 자아를 찾아 헤매는 내면의 여정이 더욱 와 닿는다.
학교의 많은 한스, 그리고 데미안들. 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기고 빛을 찾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