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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제 Mar 19. 2024

긴 밤의 시작

 LG트윈스가 29년 만에 한국시리즈를 우승한 해의 겨울이었다. 나는 미래가 창창한 대기업 회사원이었지만, 내가 처음 야구를 보기 시작한 2008년의 LG트윈스처럼, 영원히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과 맞닥트렸다. 태생이 게으르고 태평한 나는, 그런 나약함을 뛰어넘을 강력한 생존의 의지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위기가 닥치면 의지가 굳건해지고,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완주했고, 입사 시험 과제를 마감 3시간 전에 확인하고, 30초 전에 제출했다. 그러고도 그 회사에 합격했다. 그런 기질 때문에 2008년 최악의 시즌을 보낸 LG트윈스의 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밤 나에게 찾아온 절망 앞에서, 내가 자랑하던 생존의 의지는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프러포즈를 준비하던 와중에 닥친 장모님의 치매. 나는 내 첫사랑과 12년째 연애 중이었고, 12년 만에 겨우 결혼반지를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었지만 그것뿐이었다. 망상, 환각, 의심, 배회, 배변 장애, 혼미 등의 치매 증상과 상급병원, 요양병원, 요양원, 치매안심센터, 제가 캐어 센터 등 모든 의료, 요양 시설과, 장기 요양 보험, 기초 생활수급, 산정 특례, 의료비 본인 부담 상한제와 같은 모든 복지 정책에 대해 알아보고, 겪고, 극복하기에는 돈도, 시간도, 체력도 부족했다. 그건 내 첫사랑 K도 마찬가지였다. 매월 적자가 쌓여 대출이 마이너스 통장 한도에 다다르면, 어머니를 돌보는 K의 우울증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면, 이 슬픔이 사랑을 삼키고 관계가 무너지면 우리의 생존은 불가능했다.

 만일 문학에 대한 애정이 없었더라면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힘들 때마다 학부 시절 읽었던 시와 소설, 희곡 작품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예측하기 힘든 삶의 어려움과 이해하기 힘든 인간의 감정들 그리고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그 안에 있었다. 나는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지 3년이 넘어서야 그 작품들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H 여사는 끝까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이 극적인 전환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기억이 흐릿해지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의무에서 해방되면서, 그녀는 정말 그녀가 바랬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모든 계획과 목표가 무너진 자리에, 가장 나다운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마 보조작가 기회를 포기하고 취업을 선택했을 때, 나는 잘 사는 게 잘 쓰는 것보다 더 급했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는 언젠가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데, H 여사를 모시면서, 굳이 창작을 하지 않아도 내 삶 자체가 가치 있는 서사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소설가가 인물에게 고난을 부여하고, 극복하게 하듯이,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이 삶이 소설이라면 모두가 행복해져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좋은 결말로 마무리 짓고 싶었다. 차츰 생존의 의지가 솟아올랐다.


*


 불행은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대학교 선배의 결혼을 앞두고 청첩장을 받기로 한 날이었다. 퇴근길 강남역 거리는 색색의 조명 장식과 가게마다 흘러나오는 캐럴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만연했다. 당장 산타가 나타나 선물을 건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연말 분위기. 나는 들뜬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선배의 결혼에 설렐 만큼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도 프러포즈를 준비하던 시기다 보니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형수님은 어디서 만났는지, 결혼은 언제 결심했는지, 프러포즈는 어떻게 했는지, 결혼식 비용은 얼마나 들었는지.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벌써 고깃집에 도착했다는 선배의 카톡이었다. 10분 정도 후에 도착한다고 메시지를 쓰려는데, K에게서 전화가 왔다. 메시지를 마저 쓰려 전화를 끊었지만, 곧바로 다시 전화가 왔다. 영하 10도의 겨울바람이 심장을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있잖아. 이상한 일이 생겼어. 방금 서수원 지구대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네."

전화 속 K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뭐야 불안하게."

"엄마가 지금 서수원 지구대에 있다고 데리러 오래. 수원 어느 모텔에서 외삼촌을 만나야 한다고 기다리고 계셨다는데?"

"수원 모텔에서 외삼촌을 만나신다고?"

"응 그런데 이상해. 외삼촌은 수원에 사시지도 않는데."

K의 어머니는 금천구 시흥동에 사셨다. 지도 앱에서 보니 댁에서 서수원 지구대까지는 대중교통으로 1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왜 하필 수원인지, 왜 모텔에 계셨던 건지 아무리 조각을 맞추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형편없는 보이스피싱 사기 수법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다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선배였다.

"선배한테 전화 오네. 양해 구하고 금방 갈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같이 모시러 가자."

 어느새 나는 약속 장소인 삼겹살집 앞에 서 있었고, 테이블에 앉아 나를 보고 있던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가게로 들어갔다. 선배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테이블로 다가가니 벌써 불판 위에 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야 배고프지? 미리 구워놨으니까 일단 먹어."

결혼을 앞둬서인지 선배의 얼굴과 옷차림이 깔끔해져 있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도 이전과 다르게 상냥하고 유쾌했다. 찢어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같이 연극 무대를 만들던 형이었는데. 걸걸한 욕으로 후배들을 나무라던 사람이었는데.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20분만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보호자가 된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고기를 입에 넣는 걸 보고서, 선배는 소주를 주문하러 이모를 찾았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양해를 구했다.

"형... 이런 말 하기 죄송하지만, 저 가봐야 할 거 같아요."

 "갑자기?"

 "K 어머니가 쓰러지셨대요. 수원에 있는 대학 병원에 입원하셨다는데 K랑 같이 가봐야 할 거 같아요."

 나도 모르게 입에서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선배는 K의 선배이기도 했고, 우리의 연애사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거짓말도 편했다. 다행이었다. 선배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스쳤지만 쉽게 수긍해 주었다.

"그러면 빨리 가봐야겠네. 얼른 가. 대신 축의금 많이 해라."

"구운 고기는 먹고 갈게요. 아 그리고 청첩장 빨리 줘요. 잊어먹지 않게."

 선배의 농담에 안도했는지 내 입에서도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나는 허겁지겁 고기를 입에 넣고, 청첩장은 가방에 넣었다. 고기를 먹는 것과 청첩장을 챙기는 걸 거의 동시에 해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선배도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 같았다.

"조심히 가, K가 많이 놀랐을 텐데 잘 챙기고."


 식당을 나와서 차량 공유 앱을 통해 SUV 차를 빌렸다. 차가 없어서 항상 대중교통을 이용했지만, 상황이 시급한 만큼 필요할 것 같았다.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할 수도 있고, 시간이 늦어지면 버스도 다니지 않을 터였다. 나는 2-3분마다 차선을 바꿔가며 급하게 차를 몰아 사당역에 이르렀다. K는 추운 날씨에도 지하철역 앞에 서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쯤 도착하느냐는 경찰서의 연락을 4통째 받은 상태였다.

 "왜 이제 와. 경찰서에서 계속 전화 오는데."

 K는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을 때마다 부모가 아파도 나몰라라 하는 매정한 딸이 된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처음 전화를 받은 지 40분이 된 시점이었다.

"그냥 도착 시점 확인하려고 물어본 걸 거야. 경찰서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계시는 거니까 차분하게 가자. 아마 별일 아닐 거야."

 어떻게든 K를 안심시키려 해 봤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K는 어느새 외숙모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외숙모, 혹시 외삼촌 어디 계세요? 오늘 엄마랑 수원에 어느 모텔에서 만나기로 하셨다는데..."

 외숙모의 말에 따르면 외삼촌은 전혀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없고, 이미 잠드신 상태였다. 정말 보이스피싱이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사기 수법이 너무 다양하다 보니 혹시 몰랐다. 나와 K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약속 장소와 시간을 헷갈리신 걸까? 다른 일을 보러 가셨다가 길을 잃었는데 거짓말을 하신 걸까? 그러나 어떤 가정도 이 상황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괜찮을 거야. 별일 아닐 거야."

 나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러는 사이에 내비게이션은 차분하게 목적지를 안내했고, 우리는 처음 연락을 받은 지 2시간 만에 서수원 지구대에 도착했다.  K가 내려서 지구대로 들어가고, 나는  차를 주차했다. 주차장 바닥에는 전날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있었다. 출근 준비를 하며 틀어놓았던 아침 뉴스에서 오늘이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다시 시동을 걸고 히터를 가장 강한 세기로 켜두었다. 뒷자리까지 바람이 가는지 확인하고서야 나는 차에서 내렸다.

 늦은 밤 지구대 주변은 어둡고 황량했다. 2시간 전 강남역 거리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어둠이었다. 반면 건물 입구 유리문에서는 과할 정도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는데 다른 곳에 한눈팔지 말고 어서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후에 펼쳐질 일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에 흐릿한 실루엣이 보였다. K였다. 어쩔 수 없었다. 겪어내고 극복해야 했다. 겨우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괜찮을 거야. 별일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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