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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청심동의 달, 할머니들

<<1. 귤꽃- 7화>>

by 그래놀라

복자 할머니는 운동을 마치고, 하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언제나처럼 귤 봉지를 들고 주민센터 옆 일층 빵집으로 들어섰다. 운동을 먼저 끝낸 두 명의 할머니는 나란히 앉아,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켜놓고 거기에 카스텔라를 적셔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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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은 젊은 시절 여수에서 올라와 동대문 봉제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했다. 여수에서 온 미싱사들은 악착같이 돈을 모아 청심동 골목길에 아름아름 모여 자리를 틀었다.


미싱 서너 대를 들여놓고 작은 봉제소 차렸고 고향에서 올라오는 수산물로 가게를 차렸다. 그렇게 봉제 골목이 생기고 골목시장이 생겼다

.

이십여 년 전,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중 일부의 노포들이 철거되었고 가게 주인이던 그녀들은 보상으로 상가를 하나씩 받았다.


덕분에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세 수익으로 이제는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되었다. 주민센터에서 문화수업을 듣고, 운동이 끝나면 약속처럼 빵집에 모이는 것이 할머니들의 일상이었다.

빵집 앞에서 자고 있던 '청심이'

복자 할머니는 시럽을 듬뿍 넣은 라떼 한 잔과 빵 몇 개를 받아 들고는, 익숙한 자리에 앉았다.


“메리야스, 건어물 너희는 아직 1인 1잔을 모르냐? 그게 요즘 세상 기본이여. 매너랑게.”


“아따 과일형님~ 좋게 운동하시고 뭣땀시 또 시비 털고 그란다요?”


할머니들은 장사를 그만둔 지 이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젊은 시절 시장 통에서 팔던 물건ㅡ메리야스, 과일, 건어물을 이름처럼 부르고 있었다.


“요즘은 빵만 먹고 가려면 못 앉아 있게 하잖아. 어쩔 수 없이 한 잔만 시킨 거지.

이 시커먼 거, 뭣이 맛있다고들... 쓰디쓴데…”


건어물 할머니는 잔을 들고 한입 삼키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내려놓았다.

“아까운 게 카스텔라 적셔 억지로 먹고 있구먼…”


메리야스 할머니는 카스텔라 조각을 커피에 푹 적셔 입에 넣으며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오메, 촌시러라... 안나, 귤 하나 묵어라. 달디 단께.”


과일 형님으로 불리는 복자 할머니는 봉지에서 귤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형님이야말로 평생 그거 들고 다니는 게 더 촌스럽지... 귤, 안 지겹소?”


“어찌 귤이 지겹겠냐. 평생 이거 팔아서 우리 조카 양자 들여 대학 가르치고 아파트 사주고, 쩌그~ 고깃집도 차려 줬는데. 나도 호강, 저것도 호강... 귤이 최고로 이쁘지. 오메, 이 이쁜 것 보소... 징하게 귀해라~~”


귤을 들고 쓰다듬으며 뽀뽀를 하는 시늉을 하는 과일 형님의 장난에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아이들처럼 까르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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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께, 요즘 뭐시냐... 있잖아...”


복자 할머니는 무언가를 보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급히 일어나, 빵과 귤을 주섬주섬 봉지에 담아 밖으로 뛰어 나가며 소리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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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자야!”


폐지를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가던 노인이 뒤돌아섰다.


“어, 형님... 잘 지내시지라?”


“징한 년... 시방 우리 보고도 안 들러보고 그냥 가야?”


“형님들을 뭔 면목으로 들러봐요... 지가 시장서 해먹은 돈이 얼마인데. 볼 낯짝 없지라.”


“오메~ 깝깝한 소리... 언제 적 야그를 하고 있어. 지금 세상이 몇 년 돈디. 그러지 말고 주민센터로 나온나... 운동 나가자~잉? 공짜여~"


“참 내... 형님도... 목구녕이 포도청인디 뭔 운동을 한다요... 형님들처럼 아파트 받고 상가 받고 팔자 펴진 세상을 만났어야 그러고 사는 거지... 지지리 복도 없는 년이라... 내는 요 모양 요맨치로 산다 안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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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뭔 소리 다냐 봉자야~ 사람일 알 수 없다~ 끝까지 가봐야 안다 안혀냐? 너는 어따 내놔도 안 부끄러운 게... 당장 주민센터로 운동 나오너라.


시니어모델이... 그 뭐냐면... 시방 저 밑에 떡집할멈이 그거 배워서 테레비 광고에 나왔다니께...니가 지금 그라고 폐지 줍고 다닐 때가 아녀~~ 아! 생각났다! 시니어 모델 워킹 클라쓰! 이름이 징하게 어려워서 그라지 별거 없어~ 앞만 보고 걸으면 돼. 봉자야~ 너는 기럭지가 길어서 따논 당상이지! 넘겨 듣지 말고 잉?


그리고 오늘은 이거 가지고 가.”


할머니는 귤과 빵이 담긴 봉지를 봉자의 수레에 올려놓았다.


“가면서 우리 아들 가게서 밥 묵고 가. 눈치 보덜 말고. 봉자야, 알겠지?”


봉자는 말없이 뒤돌아 다시 수레를 끌며 고개를 끄덕였다.


귤과 빵이 담긴 봉지가 수레 위에 얹혀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 수레가 가볍게 느껴졌다.

그날 밤,

귤처럼 둥글고 노란 달이

동네를 가만히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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