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귤꽃- 5화 >>
희수아빠가 돌아왔다. 희수를 번쩍 들어 올리며 사우디에서 사 온 벨벳 원피스를 입히고, 처음 보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신기하게도 카메라의 찰칵찰칵 소리는, 아빠 없는 동안 겪었던 어려운 살림살이의 서러움을 잊게 해 주었다.
희수는 아빠가 사 온 긴 속눈썹이 붙은 인형을 마르고 닳도록 안고 다녔다. 오랜만에 함께 모인 가족은 잠시나마 ‘해외 노동자의 꿈’ 같은 것에 젖어 화목한 시절을 보냈다.
희수엄마는 남편이 사우디에서 벌어온 돈으로 조그만 반찬가게를 열었다. 희수아빠는 새벽마다 도매시장에서 식재료를 떼어 왔고, 그녀는 하루 종일 반찬을 만들었다.
가게 문턱에 조심스레 걸쳐 있던 좌판은 점점 길가로 밀려 나왔고, 자리를 채운 반찬 가짓수도 늘었지만, 삶은 쉽게 늘지 않았다. 칼에 베인 상처와 기름에 덴 흉터만 늘었다.
그마저도 벌이가 시원치 않자, 희수 아빠는 1년 뒤 다시 사우디로 떠났다.
희수는 엄마의 반찬가게 골목길에 소꿉놀이 장난감을 늘어놓고 놀곤 했다. 그날은 과일가게 흉내를 내며 놀고 있었다.
낯익은 여인이 고운 양장을 입고 가게 앞에 나타났다. 조심스러운 발걸음, 손엔 종합과자 선물세트와 과일 봉지가 들려 있었다.
“봉자아줌마!”
희수는 단번에 반가운 얼굴을 알아봤다. 귤과 막대사탕, 그리고 귤꽃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봉자아줌마는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오메, 우리 희수~ 이리 온나~ 잘 있었지?”
가게 안에서 희수를 내다보던 엄마의 안색은 굳어졌다.
희수를 안으려는 봉자아줌마를 막아선 엄마는 아이를 가게 안 살림방으로 밀어 넣었다.
“방에 들어가. 문 닫고, 절대 나오지 마.”
문이 닫혔고, 희수는 문틈 너머로 어른들의 말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찾아오시면 어쩌자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희수아빠 알면 난리 날 일이에요."
"자넨 젊지 않은가. 또 낳을 수도 있고... 아들도 있으니, 그거 하나라도 잘 키워야지 안 쓰겠나. 내가 돈도 좀 보태 줄란 게… "
낮고 차분하던 목소리는 이내 높아졌고, 외마디 고함이 터졌다.
“뭐라고? 당신 자꾸 뭐라는 거야? 자식이 없다고 남의 애를 달라고?
앞으로 내가 열 자식을 낳더러도 희수는 하나라고... 내 귀한 자식이라고!
그럼 그렇지, 없이 산다고 이 지경까지 보게 될 줄이야…”
“아기가 안쓰러운 게… 맨날 저러고 혼자 있잖아.
좀 여유가 있는 내가 키우는 게 어쩌면 나을까 싶어 그런 거지.
내가 욕심내서 그러는 거 아녀.
희수 엄마가 고생하는 거 알고 애가 눈에 밟혀서 그런 거지.
나도 자식 먼저 보낸 죄인 아닌가... 어려운 아기 잘 자라게 키우는 게
어쩌면 내 벌을 갚는 길일지도 모르고... 그 아이가 희수라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 노여워 말고 잘 생각해 보소.
지 엄마처럼 딱하게 클까 싶은 게,
맘이 아려야...
서운하게 듣지 말고...
욕심만으로 하는 소리 아녀, 진심이여. 희수엄마.”
과자 선물세트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희수엄마가 상자를 마구 밟았다. 포장이 터졌고, 과자가 사방으로 튀었다.
"나처럼 딱하게 큰다고요? 그만하시오! 이 손이 문드러져도 내 새끼는 내가 키울 거요!
없는 게 죄요? 그게 내 잘못이요? 나는 내 새끼한테 부끄럽지 않게 살 거요."
"고생으로 이 하루가 천날같아도 내 새끼 손 절대 못 놔, 그건 내 심장이요. 목숨이라 말이요!"
봉자아줌마는 쫓기듯 가게 문을 나섰고, 엄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아이고, 못난 년... 내가 이제 자식까지 뺏기게 생겼네...
없는 게 죄여, 없는 게... 가난이 죄여...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이고, 아이고...”
자식을 달라는 그 한마디에, 서른도 채 안 된 어린 어미는 정신을 놓고 폭발했다. 꾹 눌러왔던 원망과 분노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터져 나왔다. 희수는 문틈 사이로 엄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주저앉아 들썩이는 엄마의 어깨너머로 울음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날의 흐느낌은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살림방 낡은 벽지를 타고, 어린 희수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엄마는 부서진 과자 상자의 조각을 거듭 물걸레로 닦았다. 과일봉지는 말없이 내다 버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날 가게엔 다시 장국 냄새가 퍼졌다.
그날 이후, 봉자아줌마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어둑한 반찬가게 불빛은 아직도 희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여기저기 흩어진 과자 부스러기처럼, 가난했던 시절의 절절한 사랑은 오래도록 붙어 남았다.
모녀는 살면서 그날의 일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사십여 년이 흐른 지금, 소주 한 잔만 들어가면 희수엄마는 가끔 그날 이야기를 꺼내며 눈시울을 붉힌다.
“내가 그때... 얼마나 없이 살았으면... 그런 소리까지 들었을까... 살면서 너무 힘들 땐 후회도 있었어. 그때 보냈으면 희수가 고생 안 하고 컸을 텐데... ”
“내가 무슨 고생을 했어. 엄마~왜 또 울고 그래. 그때 엄마가 나 안 보낸 게 내 인생에 가장 큰 복이야."
할머니가 된 희수 엄마에게, 봉자 아줌마는 ‘가난’이 남긴, 아린 기억이었다.
하지만 희수에게, 봉자아줌마는 어린 엄마의 미숙함이 만든 빈틈을, 대신 감싸준 고마운 어른이었다. 그 시절엔, 그냥 ‘정’이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처음 받아본 따뜻함이었다. 귤과 막대사탕을 주고받던 어린 시절 가장 순수했던 온정이었다.
봉자네 젓갈집은 이제 사라졌고,
청심동 그 노포들 주변도 아파트가 들어서 흔적조차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