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귤꽃- 3화 >>
희수는 엄마가 청심동에 갈 때마다 먼저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어린 희수한테는 ‘봉자네 젓갈 집’에 갈 때마다 만나는 다정한 앞집 과일가게 아줌마가 어느새 ‘봉자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엄마는 가게 앞을 서성이며 누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고, 희수는 가게 간판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어느 날은 여름 소나기를 피하지 못해 젖은 채로 도착했고, 또 어떤 날은 아침부터 해가질 때까지 가게를 지키며 구들방에 앉아만 있었다.
갈 때마다 젓갈가게는 늘 썰렁했고, 진짜 봉자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대신 앞집 과일가게 ‘봉자아줌마’가 희수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어느덧 희수를 ‘아가야’가 아닌 ‘우리 희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많이 먹어, 우리 희수.”
귤을 까서 손에 쥐여 주고, 도시락 반찬을 숟가락에 얹어주며 웃었다.
“아줌마도 아가가 있었는데… 먼저 하늘나라에 갔어. 그 아기 살았음, 딱 너만 했을 거다.”
“그럼 아줌마 애기는 천사가 됐어요?”
“응. 아기 천사지... 아줌마는 이제 아기를 가질 수가 없어. 그래서 그런가, 우리 희수 보면 맘이... 짠해.”
봉자아줌마는 말끝을 흐리며 희수의 뺨을 다정히 쓸어내렸다.
“우리 복슬이도... 하늘나라에 있어요. 아줌마 아기도... 거기 있죠? 그럼 둘이 친구 됐겠다... 아! 그래서 내가 아줌마랑 친구 하러 왔나 봐요.”
봉자 아줌마는 올라오는 슬픔을 꾹 누르며 말했다.
"그래 맞아, 우리 아가한텐 복슬이가 나한텐 희수가 왔네. 천사들이 참 기특한 선물을 보내줬어~ 고마워 우리 희수, 진짜로."
희수는 청심동 갈 때마다 봉자아줌마가 주는 귤이 참 좋았다. 껍질을 벗기면 젓갈가게가 상큼한 냄새로 가득 찼고, 아줌마가 준 작은 조각 하나에 어린 마음이 안심됐다.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고, 어느덧 밤이 다가와 기다리던 엄마가 왔다.
청심동에 자주 드나들면서 희수와 과일가게 봉자 아줌마는 부쩍 친해졌다.
“요즘 엄마랑 뭐 하고 놀아?”
“아빠한테 테이프 녹음해서 보내려고 노래 연습해요.”
“오메, 그려? 지금 한 번 불러봐. 아버지가 들으면 어떨까 아줌마가 먼저 들어줄게.”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메어놓은 새끼줄~따라~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봉자아줌마는 노래를 듣다 말고 코를 훌쩍거리며 희수를 바라봤다.
“에고야... 아빠가 얼마나 그리울까... 가엾어라.”
희수가 봉자아줌마의 무릎에 기대 잠이 들 무렵, 문 밖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수야~ 빨리 가자, 나와!”
희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물었다.
“엄마~ 밥 먹었어?”
“빨리 가자, 늦었어...”
“엄마~ 돈 받았어?”
희수는 바닥에 있던 가방을 주워 들고 봉자아줌마를 돌아봤다. 엄마 손에 이끌려 나가면서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뒤를 돌아 아줌마에게 인사를 했다.
봉자아줌마는 혼자 중얼거렸다.
“여보소... 엔간히 해라. 인정머리라고는 참말로... 애를 혼자 저리 둬서 쓰겠냐... 어린 게 너무 안쓰러워...”
문이 닫히고 가게 안에는 다시 젓갈 냄새만 남았다.
희수가 가게 앞에서 인사하고 돌아설 때마다, 봉자아줌마는 귤이 든 과일봉지를 가방 안에 살며시 밀어 넣었다. 그 손을 거두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늘도 무심하지... 애 하나 있었으면, 나는... 참...”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아줌마는 모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문 앞에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온 뒤, 희수는 가방 안에서 봉지를 하나 꺼냈다. 까슬까슬한 그물망 안에 작은 귤들이 몇 알 들어 있었다. 단내가 손끝에 묻고, 입에 넣자 쌉싸름한 속살 위로 단맛이 퍼졌다.
어린 희수의 마음 한편이 아줌마 품에서 처럼 스르르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