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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Feb 17. 2020

언젠가는

사는 건 고통의 연속이다. 살아보니 나아지고 있어 더 살아보자는 희망에 가득차는 순간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겉보기엔 밝고 사랑이 충만해 보이지만 속이 깊이 썩어 있는 나는, 매 순간 삶이 어렵다. 한 번 사는 인생, 그냥 자기 길 걸으면서 행복하게 살면 안 되는 걸까.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라는 그 이름에 각인되어 있어 묻는 게 어불성설일지 몰라도, 왜 그리 남에게 관심이 많은 걸까. 깎아내리고 판단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뭘까. 지겹다. 불만 많은 인간들이, 잣대를 들이대 남을 재단하는 인간들이, 이제는 너무나 지겨워져 들으면서 웃어주고 싶지 않아져 벼렸다. 다 귀찮아졌다.


힘든 일이 있으면 대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듣는 사람도 인간이니 판단을 할 것이고 곧 날 떠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냥 사람은 순간을 살 뿐이니 순간에 취해서 행복한 척 살면 그 뿐. 힘든 일을 떠들고 우울을 남에게 공유하는 일은 사치 혹은 오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두려운 마음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 찝찝함이 먼저 파고 들어 온다. 일기를 남기면서도 찝찝해 하는 인간의 유형이니, 직접 얼굴을 보고 상처, 진심을 말하는 행위에 대해 얼마나 두려워 하는지, 말 다 했지.


그래서 남의 상처든 자기 상처든 함부로 내보이고 떠들며 동정 얻고 자기만 힘들다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간 유형에 대해서는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든다. 저렇게 쉽게 어디서든 떠들어도 되는 상처인 걸까.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하던 마음은 그런 인간들을 몇 번 겪고 나니 "자기만 힘들다" 오류에 빠져 있다는 걸 깨닫고는, 그냥 사라져 가고 있다. "얼마나 힘들었니" 진심으로 위로하고 나면 어쩐지 머쓱해지게 만드는 그런 유형의 인간들은, 상대는 상처가 없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저 겉모습만 보고는 마냥 행복한 사람인줄 알고는, 마구 할퀴어 버린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그에게도 100 중 70만을 말해야 하고 사랑하는 친구에게도, 100 중 50만을 말해야 한다. 대화에는 진심이 떠돌다가 곧 사라져 버린다. 서로 어떻게 사는지 뻔히들 아는데, 굳이 입으로 설명하며 불행을 공유할 필요 뭐가 있어. 늘 생각하는 거지만, 행복을 진심으로 공유하고 기뻐하는 관계가 값진 거지, 불행을 공유하며 훗날 불행으로 뒤통수를 치는 관계는 파국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불행한 일을 어디 떠들거나 말할 이유, 내게는 없다는 거지. 그러니 행복한 사람이라고 오해들을 하고, 함부로 찔러대는 말과 행위들에 대해 그냥 그러려니 또 연기를 하고 대하면 되는 거다. 나는 그냥 그렇게 살면 행복한 거지. 그런 거지. 계속 그리 연기하다 보면 정말 행복해질 거라고,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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