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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by 팔로 쓰는 앎Arm

#. 다정함이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여유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 다정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건강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난 인사하는 걸 좋아한다. 웬만하면 인사를 하는 게 좋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사회 초년생 시절에도 인사 안 받는 걸로 길들이는 선배들께 가서 꼭 인사를 했다. 받을 때까지 했다. 안 받으면 어쩔? 이런 표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손하게 예의바르게 하면 될 일이다. 그 후의 일은 그들의 몫이다. 이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다정함을 오글거림이나 여유가 주는 부담이 아닌 그냥 다정함으로 담백하게 받을 수 없는 분위기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게 다정함이란 그런 것부터 생각나는 단어다. 혹은 서로의 이야기를 마음 놓고 이야기하며 응원할 수 있는 관계도 의미한다. 어떠한 사욕도 없는 그런 관계 말이다. 뭐 사랑이라는 게 어느 정도의 사욕이 포함됐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덜 그런 관계 말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를 처음 봤을 때 마음으론 이해를 못했다. 그러니까, 어쩌라는 거야. 어 세탁소다. 어 아시안. 세탁소. 아 클리셰다. 이런 생각만 하다가 오 멋지다. 이러다 말았다. 내 영화 취향은 '남한산성', '라라랜드', '가여운 것들', '작가 미상' 같은 것들이다. 나열하려니 생각이 안 나는데(ㅋㅋ) 뭐 그렇다. 그러나 영화를 작년인지 지난 상반기 초인지 다시 보면서 생각한 것은 결국에는 말이다. 가장 초라해 보이는 그 삶에도 빛이 있었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것. 그러니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그리고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의 어느 편린을 사랑하고 '그랬다면' 하고 산다는 것.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며 결말에 나는 역겹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합리화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볼 때도 그랬다. 어쩌라는 거야. 그냥 이혼해!


그러나 그새 세월을 얻어맞은 나의 생각은 조금 바뀌어서(ㅋㅋ) 그래. 다정함이 이기는 걸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사랑은 승리하지 않던가? 나는 지난해부터 늘 사랑이 이긴다는 말을 곱씹었다. 코로나를 거치며 나는 그런 생각을 어렴풋하게 했다. 늘 사랑이 이기는 게 아니던가? 사랑은 늘 내 주변에 있었다. 삶이 바쁘다고 그걸 쫓아낸 건 내 손이 아니던가?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사랑이 나타나면 변수라고 쫓아내기 바빴던 내가, 심지어 바이러스라는 말을 했던 내가, 결국엔 사랑이 이긴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걸, 이 영화는 그런 걸 말하려는 게 아닌가?


사랑이 곁에 있을 땐 사랑인지 모른다. 사랑의 모양은 너무나 다양해서 그런가 보다. 사랑은 너무 어려운 일 같다. 모든 걸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아니, 이해해야 한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회피형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기꺼이 고쳐쓸 마음가짐도 있어야 한다. 고쳐쓰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받아들임의 정도를 이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따지고 보면 사랑은 기적이 아닐까? 사랑이 메마른 곳에서 나는 지나간 사랑을 생각한다. 그게 사랑이었나? 사랑은 지나고봐야 알게 되는 것 같다. 사랑이 늘 이긴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다른 걸 꿈꿔왔다. 내가 원하는 사랑의 모양은 그게 아니었으므로 말이다.


복잡한 말 하려는 게 아니다. 근래 드는 생각을 이렇게 시간있는 날 그냥 도닥거려두는 것이다(안 맞는 표현이다. 내가 하는 말이다 그냥.) 늘 사랑이 이긴다. 그 쉬운 명제를 인정하면 많은 게 쉬워진다. 설명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인연인 것은 내게 온다. 아닌 것은 간다. 나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쿨한 척하려는 게 아니다. 속세에 찌든 사랑의 모양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나의 발버둥이 역설적으로 기이한 사랑의 모양을 그리는 것 같아서 주절거리는 것이다. 그 칼날의 끝은 결국 나를 향한다. 하지마 나는 감사를 아는 이들을 만나고 싶다. 묘한(!) 에블린을 평범함으로 녹이는 웨이먼드처럼, 혹은 이혼서류를 준비한 웨이먼드지만 그걸 품어낸 에블린의 어떤 면모처럼(!) 그냥 서로의 행위가 아닌 마음을, 뭐랄까. 서로의 음영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눈치챌, 어떠한 의리. 혹은 서로의 시간에 대한 어떠한 감사가 있는 그런 교류를 하고 싶다.


이 영화는 아마 나중에 봐야 더 이해가 잘 될 것 같다.


사실 내 마음은, 이 영화에 영원히 공감하지 못하길 바란다.


아니, 공감하길 바란다.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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