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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에이드 Nov 16. 2023

미소 짓는 정집사의 은혜로운 금요일 아침

2028년 11월 16일 날씨 흐림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인 가을의 하루는 빛나고 짧다. 찰나의 오색 빛이 나는 가을 단풍을 뒤로하고 어느새 쌉싸름한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패딩을 꺼내 입기는 이른 듯해도 아침에 운동하러 나올 때는 단단히 입어야 한다. 아침 운동은 꽤 오랜 시간을 걸어온 나의 루틴이다. 애들이 어렸을 적에는 어린이집과 학교 보내며 치열하게 지켜 왔지만 지금은 꽤 여유 부리며 걸어 나올 수 있다. 15분 남짓 산책하듯 걸으면 골프 연습장에 다다른다. 언제나 마음은 테니스에 있지만 지난해 국화부 우승을 한 후부터는 게임에 대한 자세를 내려놓았다. 그만하면 됐다. 무릎에 무리가 가기도 했고 이젠 편한 마음을 가지고 운동을 하련다. 골프에 빠진 지 3년 됐다. 친구 따라 간 라운딩이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소풍처럼 즐거웠다. 잘 치면 좋았겠지만 그렇게라도 필드에 나가보니 코트와는 다른 여유에 마음이 빼앗겼다. 경쟁 없는 운동은 홀인원을 낳는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경쟁과 질투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즐겁게 운동할 수 있는 환경만으로도 즐겁다. 오늘따라 스윙이 부드럽다. 자세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 살짝 부끄러운 웃음을 지어본다.     



운동 후 가볍게 샤워하고 나오면 임윤찬의 녹턴 연주와 커피 향이 기다리고 있다. 단 5분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키보드를 꺼낸다. 임윤찬의 녹턴을 들으면서 그 시절 자판을 얼마나 두들겼던지. 브런치를 만난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할 수 있을지 의심했는데 이제는 멈출 수 없는 글 생활이다. 출근하던 버스 안에서 찍었던 하나의 점이 지금도 생생하다. 점들은 반복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치열하게 사는 것 같아도 소진되고 증발해버리는 시간에 회의가 넘쳤다. 글을 만나면서 그런 버린 시간들을 소중하게 끄집어내어 꾹꾹 담아내었다. 즐거워졌다. 쓰지 않아 쳐져 있던 얼굴 근육들이 눈 끝까지 당겨 올라가는 기분이다. 웃는다는 것이 이렇게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다. 즐거울 수 있고 별거 아닌 이야기에 깔깔거릴 수 있다. 유머는 지천에 깔려있다.      



“어머, 집사님, 일찍 오셨네.”

“머야, 아침인데 왜 이렇게 화사해. 예쁘잖아.” 

“원래 예뻤어요. 오늘은 더 예쁘고.”


구역 성경 모임 시간이다. 오늘은 우리 집 차례인데 1층 오픈 공간으로 모였다. 편하게 와서 좋아하는 음료를 마시면서 잠시 쉬었다가는 마을 앞 나무처럼 우리 집이 이렇게 누구나도 편하게 들어와서 쉬었다 가는 곳이 있었으면 했다. 남편은 카페 하는 것을 제안했지만 카페 일들로 좋아하는 공간을 채우긴 싫었다. 남편과 상의 끝에 3층 타운 하우스를 재작년에 구매했다. 그리고 1층을 사랑방과 같은 공간으로 오픈했다. 아이들도 친구들과 편하게 와서 방해받지 않고 자기들의 시간을 보내게 했다. 어려서부터 이사를 많이 다녀서 애들이 친구들을 깊게 못 사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은 뭐 하려 했을까. 아들 친구들은 어쩜 이렇게 예의 바르고 유머 있는지 예뻐 죽겠다. 남편도 그 공간으로 편하게 사람들을 초청한다. 한 번은 우연찮게 딸 친구들과 아빠 친구들이 만나게 되어 토론의 장을 만들었단다. ‘토론은 무슨. 우리 고딩 언니들 만만치 않은데 대화를 이어 나갔단 말이지.’ 



집 한 곳을 이런 공간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5년 전 브런치에 올린 잡문집 <소소한 읽을거리>가 출판되면서부터이다. 사실 책 한 권 나온 것이 집을 살 만큼 대단한 일은 되지 못한다. 연달아 일어난 의외의 사건이 날개가 되었다. 남편은 오래전부터 책을 쓰고 싶어 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나를 보고 자기도 쓰고 싶다고 한 것이다. 남편은 물리학과를 나와서 글보다 숫자가 익숙한 사람인데 굳이 왜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핀잔을 주었는데... 결론적으로 남편의 책이 대박이 났다. 제목이 <물리학으로 본 인문학 이야기>라고 SNS에 올린 글들이 ‘좋아요’를 받더니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졸지에 부부가 출간 작가가 되었다. 남편의 책은 계속 출간 예정을 받고 있다. 도대체가 뭘 쓰는지 모르겠지만 신나 보이고 이럴 땐 조용히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딸은 아빠를 닮아서 숫자를 좋아하고 카이스트에 가서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딸이 수학 문제 풀다 머리 식힐 겸 올리던 웹 소설이 있다. 제목이 <사랑의 함수 그래프>라고 사랑에 빠진 함수들의 이야기를 그래프와 함께 올리는 것 같다. 100% 문과인 나는 도무지 모르는 이야기인데 이게 그렇게 요즘 애들 코드에 맞나 보다. 여기저기서 간간히 드라마 제의 문의가 들어왔는데 작년에 디즈니 플러스에서 계약과 함께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됐다. 세상에 글 쓰는 과학자들이 그렇게 많았나. 우리 집에 두 명이 있다. 아. 아들은 그렇게 사게 된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잘 놀고 있다.      



집사님들과 서로의 삶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다 보면 삶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그럼에도 낙심하지 않고 돌아보는 삶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된다. 모임에는 언제나 깊은 눈물이 있고 웃음이 있다. 꽃밭을 부러워하지 않고 가시밭길을 피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곳에서 평안하길 기도하며 진심으로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감사하다. 꺄륵거리며 소녀처럼 웃을 수 있음에. 세상에서 웃긴 사람으로 헤퍼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감사한 금요일 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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