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씬하면 끝장나게 행복할 것 같아. 길 가다가 예쁜 옷이 있으면 사이즈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고, 앉으나 서나 거리낄 지방이 없으니 몸은 얼마나 자유롭고 가벼울까. 유니폼이나 단체 티셔츠를 맞출 때도 옷이 맞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고, 한여름에는 비키니도 입을 수 있겠지. 무엇보다 나는 자신감이 넘칠 거야. 세상을 지금보단 더 적극적인 자세로 살 것이 분명해. 매 순간이 날씬한 내가 꾸려가는 완벽한 나날이겠지. 그때는 애인도 있을 거야. 지금은? 누구도 만날 수 없어. 열등감에 절어 있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도, 상처받고 싶지도 않아. 지금은 아니야. 내가 날씬해졌을 때, 준비되었을 때.
한참을 지인 앞에서 저런 말들을 주절거렸다. 뚱뚱하단 이유로 억압 받았던 내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병적이지? 하지만 그것이 진실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어' 같은 말들도 살뜰히 챙겨가면서. 묵묵히 내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감이 일렁였다.
"(격양되어있는)나는 평생을 날씬하게 살았어!!!"
나는 놀란 눈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지금 충분히 괜찮아', 혹은 '뚱뚱해도 자신감 있게 사는 사람도 있잖아. 살이 문제가 아니야' 같은 평소 자주 들었던 반응을 예상했던 터라 충격이 컸다. 평생을 날씬하게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녀는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날씬한데(실제로 그녀는 날씬했다) 왜 애인이 없는 거냐며, 그럼 나는 뭐가 문제인 거냐고 왜 네가 말한 것처럼 완벽하지 않냐고 절규를 했다. 그거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실수를 직감했고, 뻘쭘해진 나는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뚱뚱한 사람은 피해자', 더 나아가 '나만 불쌍해' 같은 해묵은 피해 의식이 보기 좋게 한 방 당한 것이다.
뚱뚱하다는 특징을 가진 나는 언제나 날씬함이라는 특징을 가진 사람들보다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아직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간과한 게 있다면,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이었다. 저 사람은 날씬하니까 문제없고, 나는 뚱뚱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는 간편한 사고. 날씬함은 특징일 뿐이지, 언제나 완벽하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데 왜 그것을 이렇게 자주 잊어 버릴까. 살을 떠나 그들도 나처럼 자꾸 한계에 부딪히는 벽 하나쯤을 갖고 지내는 건 다 똑같은데. 언제나 이렇게 나만 문제인 듯 말하는 태도는 얼마나 볼썽 사나운가.
정말 날씬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그런 패해의식도 버릴 수 있을까? 지금 내 모든 불행의 원인을 살 때문이라고 탓하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달려가기만 하면 될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실은 그게 가장 두려웠다. 살을 뺐는데도 난 여전히 만족할 수 없을까봐. 나를 따라 다니던 우울, 낮은 자존감, 열등감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까 봐. 그때 난 무엇을 탓해야 할까. 나는 진짜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하다못해 어떤 몸을 갖고 싶은 걸까. 날씬한 몸이라는 것은 너무나 막연하고 주관적인 기준이다. 예쁜 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언제나 누군가가 만든 주관적인 기준에 내 몸을 끼워 맞추려고 애를 썼다. 허리는 잘록하게, 엉덩이는 최대한 크게, 골반과 어깨라인 같은 것들은 타고나길 그렇게 잘 빠지게 갖고 태어나야 한다고 하니 살을 거둬낸 뒤 부모님께 감사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결정하기로 하면서.
누구나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그런 이상적 몸매를 가질 수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나 차고 넘친다. 소셜 미디어, 연예인들의 비포 애프터, 심지어 운동하는 일반인들까지. 그런 몸을 갖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변명일 뿐이다. 남들은 다 하는데 왜 나만 못할까. 이상적 몸매에 도달하지 못한 뚱뚱한 몸은 필연적으로 불행을 동반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비난을 받아도 싸. 뚱뚱한 내가 잘못이지. 모든 문제를 '살'에 대입하면서. 더이상 그런 잣대에 휘둘릴 수 없었다. 이제는 나만의 기준을 먼저 바로 세울 차례였다.
내가 설정한 건강한 몸은 어떤 모습일까. 그 상상이 가능해지는 때는 결국엔 마음 회복이 이뤄지고 난 뒤다. 오랜 시간 잘못 습득해온 몸에 대한 생각을 인정하고, 그 생각과 함께 뒹굴어 살아보기도 하고, 헤어질 수 있으면 헤어져 보기도 하는 과정 같은 것 말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품어왔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데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생각은 얼마나 못 되고 끈질긴 손님일지 모르겠으나, 우리 집에 놀러 온 손님이니 다그치며 내쫓지 말고 각별히 모셔볼 생각이다. 혹시 모른다. 알고 보니 생각보다 수줍음이 많아 조금만 잘해줘도 온화해질지. 그렇게 어느 날 내 몸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낼 때, 그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안팎으로 코어가 단단한, 에너지 넘치는 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