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사이즈 3XL

by 김소영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작은 목표가 있었다. 헬스장에 비치된 그놈의 3XL 티셔츠를 입는 것. 딱 봐도 XL쯤으로 보이는 티셔츠를 3XL라고 거짓 분류해 놓아서 나 같은 사람 여럿 뒤통수 쳤을 그 티셔츠 말이다. 자고로 3XL는 보기만 해도 널~널 할 것 같은 심적 안정감을 줘야 하는데, 헬스장 티셔츠는 입자마자 어라? 하는 것이다. 말도 안돼. 이게 3XL라고? 조금의 공간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몸에 꽉 끼는 이 옷이? 이제 하다못해 3XL도 안 맞는 몸뚱이가 된 걸까. '프리사이즈'라고 해놓고 작은 옷은 숱하게 봤어도, 무려 3XL를 내건 옷이 작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충격이 컸다. 결국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옷을 다시 벗으며 내 이 티셔츠를 언젠가 기필코 입으리라 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잠시 끊어놓기만 했던 헬스장도 그랬다. 가장 큰 사이즈의 티셔츠라고 해도 언제나 조금씩 다 작았다. 심지어 그 헬스장은 사이즈별로 색상을 달리했는데, 가장 큰 사이즈는 유독 튀는 형광 연두색이었다. 그럼 만천하에 '나 가장 큰 사이즈 옷 입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옷이 안 맞아요'하는 격이었다. 그게 어찌나 창피하던지. 나도 편하게 헬스장에 비치된 옷을 입고 싶은데, 항상 개인 운동복을 들고 다녀야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가장 큰 사이즈라도 그 옷이라도 맞았으면 하던 마음. 딱 5개월 전에도 그런 마음이었다.


지금은 맞을까? 탈의실로 가는 길에 조심스레 3XL 칸에 놓여 있는 티셔츠를 한 장 꺼내 들었다. 내 옷을 허겁지겁 벗어 던지고 헬스장 티셔츠에 머리를 끼워 넣었다. 양팔도 마져 끼워 넣으니 차르르 하고 옷이 떨어졌다. 살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일자로 유유하게 떨어지는 천의 흐름. 뭐야 이거 헐렁한 거야?, 나 지금 옷 맞는 거지? 거울 앞에서 360도로 회전해가면서 꼼꼼히 확인했다. 팔을 이만큼 들어도, 몸을 옆으로 비틀어도,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도 거리낌 없을 만큼 여유롭게 맞았다. 과거엔 숨도 못 쉴 만큼 꽉 끼던 옷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엄청 예쁜 옷도 아니고 그저 헬스장에 비치된 검은색 반팔 티셔츠가 맞았을 뿐인데 환호를 지르고 싶을 만큼 기뻤다. 3XL라도 상관없었다. 이제는 개인 운동복을 챙겨오지 않아도 되고, 항상 옷 때문에 무거웠던 가방도 가벼워질 테고. 이건 뭐, 난 자유라는 거지!


다이어트하다가 가장 짜릿한 순간이 이런 게 아닐까. 벼르고 벼르던 옷이 맞을 때, 안 맞을 거라고 의심하던 옷이 맞을 때, 원래 입던 옷들이 커질 때. 그사이 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볼록하게 만져졌던 아랫배, 브라 라인대로 강조됐던 등살, 두 겹 세 겹 그 이상으로 겹쳐지던 옆구리 살, 얼굴을 두둑하게 감싸던 턱살, 허벅지 살, 팔뚝 살 그 모든 게 조금씩 정리되었다. 완벽하게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하게 줄어들었다.


옷이 커지는 것은 물론이었고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뱃살 때문에 발을 닦고 양말을 신는 게 불편했는데 그것이 수월해졌고, 발톱을 깎는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허리통증 또한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어깨결림도 많이 좋아졌다. 몸의 가뿐함은 생활의 활력을 주었는데 계단을 오르거나 걷고 뛰는 것과 같은 몸을 움직이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무엇보다 자신감의 회복. 누군가에게 지금의 나는 여전히 헬스장에 있는 3XL 티셔츠를 입는 뚱뚱한 여자이겠지만, 나에겐 다른 존재였다. 좀 더 나은 나였고, 가능성을 보여준 나였다. 아직도 빨리 핫바디가 되고 싶다는 조급함에 자주 혐오를 느끼지만 조금 덜, 낮은 강도로 느낀다는 것은 내겐 큰 변화였다.


운동도 익숙해졌다. 체력이 좋아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새벽 운동 그 자체가 어떤 안정감을 줬다. 종종 아침에 운동을 가지 못하는 날에는 퇴근하고 저녁에 헬스장을 갔다. 그럴 때마다 새벽과 너무나도 다른 풍경에 한참을 적응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구를 사용하는 운동은 할 수도 없었고, 매트 위에서 스트레칭하는 것도 기다렸다가 해야 했다. GX프로그램까지 활발한 시간대여서 두 배로 시끄러웠고, 샤워실 탈의실 모두 지나치게 붐볐다. 그뿐 아니라 지켜보는 눈이 많다 보니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면 저절로 새벽 시간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자주 만나서 익숙한 몇 명의 사람들, 한가한 공간, 조용한 열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새삼스럽게 놀란다. 나도 이제 새벽 운동이 더 잘 맞는 사람이 된 걸까. 새벽 운동은 절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나 저녁 운동을 마치고 황급히 집으로 도망가는 날이면 내일은 꼭 아침에 운동하고 출근해야지 라고 다짐하곤 했다.


절대 변할 수 없을 거라고 의심했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헐렁한 3XL 티셔츠, 사소한 생활습관의 변화, 새벽 운동의 안정감 같은 많은 것들이 적극적으로 내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자랑이었다.


나, 이만큼 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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