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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방 Oct 14. 2023

B와 나

B


(은물 씀)


일주일 동안 버스에서 내려야 할 역을 3번이나 지나쳤다. 혜화에 가야 하는데 버스를 잘못 타서 강남역에서 다시 지하철을 탔다. 경희궁에 가야 하는데 명동에 내렸다. 40분이면 도착할 거리가 1시간 30분이 걸렸다. 지하철은 타기 싫었다. 사람들의 피곤한 얼굴, 앉을자리가 없는 빽빽함, 꽉 막힌 주변, 수많은 광고, 환승하기 위해 방향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는 긴장감, 긴 환승 통로를 걷는 게 싫었다. 


생각 없이 몸만 앞서는 일이 많았다. 영화관에 가서 매표소 위치가 바뀌었다는 안내 문구를 읽고도 원래 매표소가 있던 곳으로 갔다. 2관이 몇 층에 있는지 확인하지 않아서 헤맸다. 카페에 있는 키오스크에서 주문표를 끝까지 안 뽑은 걸 모르고 음료가 나오지 않아서 당황했다. 


매일 울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지하철에서 노래를 듣다가, 영화를 보다가. 누군가가 내게 했던 행동, 말을 곱씹다가 울컥했다. 눈빛이 멍해지고 머릿속에 있던 모든 게 다 지워진 것 같은 감각이 몇 번씩 찾아왔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많이 먹고 자고 싶었다. 그게 밤이 찾아오면 느끼는 유일한 욕구였다. 


*

이런 날을 보내는 중에도 함께 사는 고양이 B는 ㅣ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9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앞 문장은 B가 노트북 자판 위를 지나가면서 발바닥으로 쓴 흔적이다. 자기에 대해서 쓰는 줄 알았는지 신기하게도 방금 지나갔다. 내가 B에 대해서 쓰는 문장보다는 이 문장이 더 B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B가 직접 썼으니까.)


B는 이 집에 온 뒤로 매일 아침에 내가 일어날 때마다 “냐아아아아-”하고 살짝 소리를 지른다. 나는 B가 일어난 나를 반기는 거라고 멋대로 해석하지만, B에게는 다음 과정의 의미가 더 클지도 모른다. 1. 배가 고프다 2. 반려인이 일어났다 3. 반려인은 일어나면 아침밥을 준다 4. 빨리 밥 줘!


아침마다 B의 존재를 느끼면서 깬다. 나는 한쪽으로 누워서 몸을 웅크리고 잘 때가 많은데 반대편 틈새에 늘 B가 앉아있거나 누워서 나를 보고 있다. 가랑이 사이나, 겨드랑이 사이에 있는 것도 좋아한다. B가 가장 좋아하는 건, 15분~20분 간 사냥 놀이를 하고, 보상으로 츄르를 먹고, 궁디팡팡과 빗질을 받는 거다. 이 과정은 B가 즐거울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하루에 많이 반복될수록, 계속 집에만 갇혀있는 B가 덜 지루하다. B의 권리이기 때문에 이 과정은 나의 의무이기도 하다. 의무를 저버리는 날이 너무 많지만.


내가 밖으로 나갈 때 B는 신발장에서 나를 응시한다. 그 눈빛이 슬픔만은 아닐 텐데, B에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지 못하고 집을 나오면 죄책감이 든다. 집에 돌아가면 B는 신발장과 부엌 사이에 있는 문에 앞발을 대고 송곳니가 보일 정도로 크게 울면서 나를 부른다. 기쁜 날에도, 슬픈 날에도, 지친 날에도 이런 환대를 매일 받는다. 


*

긴장한 채로 집에 돌아온 날도 있었다. 그날도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이었는데, 정류장에서 제때 내리지 못할까 봐 폰도 보지 않고 바깥 풍경을 확인했다. 힘이 없는데, 힘을 내야 일상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게 우스웠다. 무사히 집 근처에 내렸을 때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뒤섞여 있었다. 밤마다 허기진 나는 편의점에 가서 가장 좋아하는 컵라면을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차장에 있는 고양이 밥자리도 확인했다. 힘든 날에는 밥이 없어도 못 본 척 지나가지만, 내가 허기진 날은 힘들어도 밥을 채워둔다. 내가 허기지니까 고양이가 느끼는 배고픔도 이 감각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어제는 다행히 밥이 남아 있었다. 


힘든 날에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B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일 때가 많다. 나는 누워서도 심심하지 않게 폰이라도 볼 수 있지만 B는 내가 곁에 있다는 안정감 말고 즐거움이 없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는 날은 무기력해도 몸을 일으켜서 사냥놀이를 한다. B의 밥을 챙겨줄 때도 비슷한 이유다. B에겐 하루 세 번 하는 식사가 즐거움일 테니까. 


내가 B를 일방적으로 돌보는 것이 아니다. B도 나를 돌본다. B 앞에선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 B에게 나는 그저 나일뿐이다. B는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B에게 원하는 것은 아프지 않고 오래 내 곁에 머물러주는 것. 그건 내 욕심일 뿐이다. 오래 사는 걸 B가 원하는지 알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 몸에 자기 몸을 붙이고 있는 B, 내 돌봄을 필요로 하는 B.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기 위해 힘을 내고 있는 요즘, B가 곁에 있어서 힘이 난다. B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힘을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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