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13.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렸다.

아빠는 왜 다시 피아노를 쳤을까?

by 사랑 머금은 햇살

넌 제발 후회하지 마라.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남자도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어머니는 도망치는 나를 붙잡아 처 피아노 학원으로 데려가셨다. 아들 키우는 엄마들은 아들보다 빠르고 강다.


빠른 엄마에게 붙잡혀 등록한 피아노 학원은 거의 모두 여자 아이들이었고, 나는 여자 아이들만 배우는 피아노 배우는 게 그렇게 싫었다. 그래도 강한 엄마가 무서워서 꾸역꾸역 학원에 다니다가, 체르니 30번 치다가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지금은 그때 덜커덕 그만둔 것을 그렇게 후회하고 있다. '그때 강제로라도 좀 더 배우게 하시지.'라는 "철없는 불평"을 "철들고 나서" 지금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한테 종종 전하곤 한다.




볼수록 몽당연필 같았던 내 아이의 엄지와 새끼손가락의 한 뼘이 피아노의 한 옥타브 길이와 얼추 비슷해지게 되면서, 난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로 했다. 좋은 레슨 선생님을 때마침 알게 되어 아이의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세상 재밌는 게 많고, 정신 산만한 이 날개 없는 천사는 그러나, 아빠의 바람과는 달리 도통 피아노 연습을 안 했다.


"아빠, 축구가 더 재밌거든." 알았거든. 근데 축구를 하루 종일 하지는 않거든. 너 대학생 언니되면 피아노가 더 재미있을 거거든.


여러 가지 설득 방법을 고민 끝에 할 수 없이 내가 다시 피아노를 쳐보기로 했다. 언제까지? 아이가 피아노에 관심을 가질 때까지.


그리고, 일단 현관 앞에 충전 스테이션을 만들어, 핸드폰이나 아이패드등... 아빠, 엄마, 그리고, 내 아이의 소중한 시간을 잡아먹던 "요물"들은 집에 들어오면 무조건 이곳에 놔두기로 했다. '아빠, 엄마는 더 이상 핸드폰 안 볼 거거든. 너도 유튜브 그만 보라는 얘기거든. 너 심심하게 만들어서 피아노 연습하게 하려는 봉황의 뜻이거든.'


그런데... 피아노 악보를 어디 뒀더라... 먼지가 쌓여있던 다양한 피아노 악보를 책장에서 찾았다. 악보집에 쌓인 먼지 두께가 거진 책 두께와 비슷했다. 어휴.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여하간,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아이는 딴짓하다가도 옆으로 와서 피아노 건반을 뚱땅뚱땅 건드렸다. '아니, 아빠가 피아노를?' 하는 표정으로. 그럴 땐 아무 말하지 않고, 아이가 좋아하는 징글벨 같은 캐럴이나 당시 한참 즐겨 듣던 At My Worst 등을 쳐줬다. 엄밀히 말하면 멜로디로 치는 시늉을 한 거지만.


내 두 손이 조금씩 악보에 익숙해지면서 단선 멜로디는 화음이 되어갔다. 오른손만의 멜로디가 양손 화음 연주가 되면서, 내가 피아노 칠 때 아이가 옆에 앉는 횟수가 늘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아빠가 연주하니 신기한 것이다. '딸, 제발 연습 좀 해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딸아이에게 뭔가 설득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호랑이 축구하던 시절 교양 과목으로 들었던 수사학이 떠올랐다. 수사학(Rhetoric)은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말과 글, 그리고 그 이론을 의미한다. 다른 것은 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라는 세 가지 기본 요소로 설명했다는 것만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이의 피아노 연습을 위해서, 그 희미한 기억을 다시 꺼내게 될 줄은 몰랐다.


로고스는 논리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익숙한 설득 방식이다. "A는 B고, B는 C니까, A는 C다." 뭐 이런 게 로고스다. 파토스는 감정이다. 두려움, 기쁨 같은 다양한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에토스는 신뢰나 권위를 바탕으로 한다. 강연자가 자신의 학력이나 경력을 강조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요소 중 아이에게 가장 효과적인 건 무엇일까?




초등학생 아이를 설득할 때는 파토스(pathos, 감정)가 가장 중요했다. 아이들은 감정에 민감해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보다는, 감정적 연결과 공감에 더 잘 반응했다. 어린아이에게 책 많이 읽어야 한다고 말할 때, 아빠가 S대 국문학 교수라는 사실은 아이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또한, 우유를 많이 마시라는 말을 할 때 우유가 발육에 좋다는 학술 논문을 인용해봤자다. 그저, "우유 많이 마시면 키가 Tara처럼 큰다. Tara는 매일 우유 3잔씩 마신대. 키가 크니까 다리도 길고 그래서 축구 슛도 잘하잖아."가 그나마 잘 먹혔다. (Tara는 초등 5학년 여자아이인데 키가 167cm이다. 나하고 비슷하다. 쩝.)


그런데, 기존 수사학에는 없는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을 정립할 때 빼먹은 것을, 내가 발견했다. 아리스토텔레스한테 자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었다 하더라도 자기 아이한테 별로 신경 안 썼던 것이 분명하다.


아이는 아빠, 엄마를 따라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부터 수많은 부모들에 의해 검증된 "육아 이론"이 있지 않은가. "애들 앞에서는 냉수도 못 마신다."라는 전문 이론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국인이었다면,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다음에 "냉수"라는 요소를 추가하지 않았을까. (쓰고 보니 나름 괜찮은 거 같다. 로고, 파토, 에토, 냉. 죄송.)



여하간,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보완하는 4번째 요소를 나의 '엉뚱 발랄한 천사'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발견했다. 논리, 감정, 권위. 이 3가지 요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아빠, 엄마의 "솔선수범"이었다.


아빠, 엄마는 핸드폰만 붙잡고 있으면서 아이한테는 "책 읽어라, 운동해라, 피아노 연습해라."라고 잔소리하면, 아빠, 엄마의 목만 아플 뿐이다. 하지만, 엄마가 늘 책을 읽고 있다면, 아빠가 아침마다 운동하고 출근한다면, 그리고, 아빠가 피아노 연습을 매일 한다면...


아이는 잔소리 안 해도 자연스레 아빠, 엄마를 따라 할 것이다. 아, 그런데, 또 다른 놀라운 발견을 했다. 내가 아침 먹기 전에 콘도 근처에서 조깅을 하기 시작하니까, 그렇게도 운동 싫어하던 아내도 운동화를 신고 뛰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금 살아있다면 난 그에게 건의할 것이다. 당신의 수사학에 한 가지 기본 요소를 추가해야 한다고. 논리, 감정, 권위에 더하여, "솔선수범". 이제 수사학의 기본 요소는 4개다.




아빠가 피아노 친지 열흘정도 지났을까. 아이는 아빠 없이도 피아노 앞에 앉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일매일.


* 울트라 슈퍼 늦둥이 아빠의 육아/교육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 이 아이에게 개발 (Dog Foot) 아빠가 축구 가르친 이야기 => https://brunch.co.kr/@graydad/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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