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다보면 사소한 부분에 대해 자기 방식과 취향이 생깁니다. 저와 아내사이에서도 청소에 대한 다른 기대와 취향, 방식이 있습니다. 각자 역할을 나누면 자신의 공간이 생겨서 취향대로 청소를 할 수 있습니다. 화장실 칫솔 놓는 방식으로 다툰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는데, 가급적 각자의 방식을 허용하는 일이 유익하다 생각합니다.
2015년까지 저는 효율을 매우 중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행히(?) 중국에서 일하면서 위임과 개취인정을 하는 협업 관계를 익혔습니다. 솔직히 굉장히 괴로운 기간이었지만, 나를 바꾸는 일이 어려움으로 드러난 듯합니다. 오직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바꾼다는 중용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개취인정을 몸에 탑재하면 아래 사진에 담긴 청소가 가능합니다. 침대를 청소기로 밀고 있고 아들은 침대에서 점프를 하며 놀고 있습니다. 제가 청소하는 공간을 침해하지 않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개취인정 이전에는 방에서 나가라고 하고 청소하는 방식을 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있으면 편안하게 어떤 일에 집중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들은 청소하는 아빠와도 계속 무언가 함께 하길 원하기도 하니까요. 이때, 저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청소에 집중하도록 저리 가라고 할 수도 있고,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하는 아들의 욕망과 청소하려는 제 욕망을 모두 적절히 충족시키는 운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아이는 식탁에서 글씨를 쓰다가 어떻게 쓰는지 물으려고 왔습니다. 오른손으로 연필을 들고 있네요. 이때, 가장 중요한 일은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청소할 때 이러면 안되' 같은 당위를 갖는 일도 위험합니다. 이런 생각이 나를 지배하면 감정이 올라오고, '아이가 나를 왜 찾아왔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물안 개구리가 되는 것이죠. 여유는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행히 나를 다스릴 수 있어서 아이에게 필요한 답(애정)도 하고, 청소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청소기를 잡고 있으니 글씨를 써줄 수는 없고, 이런 난관은 우리를 창의로 이끕니다. 창의성의 원천이 바로 난관이죠. :)
저는 거실에 붙여둔 한글표를 떠올립니다. 가로 x 세로 테이블 형태니까 몇 번째라고 불러주면 아이는 그걸 찾습니다. 아빠와 함께 상호작용하는 놀이로 바뀌죠.
잠시 청소를 멈추고 아이가 어떻게 하고 있나 현장(?)에 가봅니다. 가서 눈으로 확인하니 아이의 모습외에도 한글이 조합으로 된 언어라 테이블 구조를 읽을 수 있다는 당연하지만 무시하고 살던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성취를 확인해줍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는 자신감을 쌓아가겠죠. 밝은 얼굴이 뿌듯합니다.
창문을 열고 이불을 터는데 창밖에서는 길고양이도 놀아달라고 찾아옵니다. 애들은 괴롭혀서 그런지, 제가 청소할 때마다 찾아옵니다. 딱히 놀아주지도 않는데 말이죠.
아이가를 불러 고양이와 교감할 시간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청소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