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발걸음 실천법 No. 12
<내 운명은 고객이 결정한다> 저자이기도 한 페친님 글을 읽으면서 나의 첫 멘토였던 첫 회사 대표님이 알려주신 여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보 컨설턴트로 혼자 버거운 프로젝트를 맡던 때였다. 생소하기 짝이 없는 원자력 발전소의 제어기 전산화 프로젝트에서 설계를 혼자서 하는 일이었다. 물론, PM도 있고 발전소 경력이 충분한 연구원들이 설계를 위한 백그라운드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설계 자체에 대해서는 온전히 혼자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원래 후보자였던 회사 선배는 10년차였는데, 지방(대전)에는 안간다고 하는 바람에 내가 대타가 되었다.
발전기 운영지침을 보는데 그야말로 조사빼고는 알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막막하기 짝이 없는 그 프로젝트 초기에 발표를 앞두고 몇 분 남지 않았을 때에 회사 대표님이 전화를 하셨다. 나는 조급하기 짝이 없는데 여유로운 목소리로 상황을 물으셨다. 정신없이 발표 자료를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대표님은 나에게 꼭 건물 바깥으로 나가 자연을 둘러보라고 하셨다. 부탁이라며 (당시로는 거북하기 짝이 없는) 사랑한다는 말까지 남겼다.
그 말을 따를 생각은 전혀 없었고, '사장이라 여유롭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며 짜증이 잔뜩 났다. 그런데 묘하게도 거북하기 짝이 없던 '사랑한다'는 말 때문에 행동을 안하려니 찝찝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고, 약속은 지키려고 서둘러 나갔다가 바로 들어 오려고 복도로 뛰었다. 뛰면서 속으로 가뜩이나 없는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에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런데 건물밖에 다다르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자연환경이 좋기로 이름난 연구소 단지는 나를 변하게 했다. 나가서 벤치에 앉는 순간 나는 너그러워졌다. 그리고 금새 생각이 바뀌었다. 5분이나 10분동안 뭘 더 하겠는가? 분초를 다투던 나는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발표 자료 없이 (살면서 가장 여유롭게) 발표를 마쳤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대표님 전화가 왔다. 어땠냐고 물으셨다. 발표 결과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유가 어떤 조건에 다다르면 그때야 생기는 것인 줄 알았는데, 노력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아니, 그렇게 기억하지만, 실제로 뭐라 답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벌써 18년이 지난 일이니까.
바로 며칠전 우리회사가 첫 회사인 동료와 화상 회의를 하는데 마침 첫 회사 대표인 내가 멘토께 배운 바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다른 동료가 아래 올린 글을 보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다.
이제 행동에 들어가야 하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결정을 미루라는 의미인가요?
나는 너무나 유쾌한 질문에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라'는 말을 마흔이 되어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떠올였다. 20대에 그런 표현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결정의 미루라는 표현 대신에 여유를 만들라는 말이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가기에는 더 나은 힌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는 간편한 방법을 조언했다. 사실 더 짧게 호흡만으로도 가능하지만, 결국 내면의 나에게 잠시 여유를 만들어줄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맞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