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공학과 인문공학도구 2
이 글은 한 편의 시와 같은 최봉영선생님의 글이 낳은 글이다. 아니 선생님에 페이스북에 띄운 글이 씨앗이라면 이 글을 키운 사람은 나의 생각이며 말이겠다.
전에 통화로 최봉영선생님께서 메타버스에 대해 설명하시는데 반만 동의할 수 있었다. 내가 동의했던 부분이 바로 아래 문장에 담겨있다.
사람이란 말이야,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말이야,
끊임없이 말로 생각을 하더란 말이야,
그리고 통화에서 감명깊었던 부분을 나누면, 유니버스와 메타버스의 차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유니버스를 말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유니버스는 세상이 하나라는 믿음이다. 반면에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각양각색이고, 서로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하다. 과학은 세상에 대한 완전한 측정조차 현생 인간의 능력밖이란 점을 밝히고 있다. 결국 과학적으로 보면 유니버스란 믿음은 미신이다.
그런데 임자의(주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세상은 내 말로 표현되는 것인지라 유니버스라기 보다는 메타버스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잘 표현한 글이 또 최봉영선생님 시구로 존재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말이야,
밥상에 놓여 있는 미역국을 내려다보면서 말이야,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니 말이야,
모든 게 말짱 말이더란 말이야.
모두가 그냥 한바탕 말이란 말이지.
최선생님 글을 볼 때와 아주 비슷한 시기에 시공농부님의 깨달음에 대한 글도 읽었다. 그 중에서 실타래처럼 꼬이는 화두에만 초점을 맞춰보자. #순리대로 를 말했던 때 내가 그린 그림처럼.
인용할 글은 여기에 있다.
퇴전(退轉)은 깨달음의 경계에서 물러나 이전의 경계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말합니다. 깨달아 공부를 마쳐놓고 퇴전하는 이유는 미세한 한 생각에 다시 속기 때문입니다. 현상계를 지금의 모습으로 구현한 것이 생각이니 그 힘은 정말로 미묘하고 강력하여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상계를 지금의 모습으로 구현한 것은 창조주가 아니고 바로 나의 생각이다. 이것이 최봉영선생님의 메타버스와 이어지는 실타래다. 차이가 있다면 최봉영선생님이 말이라고 했고, 시골농부님은 생각이라고 한다.
감상의 끝은, 다른 말로 나의 메타버스 구현은 여기서 인문공학으로 향한다. 이틀 전에 행한 기록의 힘이다. 인문계 대학의 암담한 모습을 지인이 실감나게 설명했다. 사실 인문 교육 혁신의 필요성은 최봉영선생님이 여러 차례 전화로 역설하셨다. 모르지 않았지만, 본업과 거리가 멀어서 뭐를 할 수 있나 망설이던 일이다. 일단, 나의 두 아들은 공교육에 폐해에 그대로 노출할 생각은 아니니까. 두 아들에게 하듯이 나가 아는 바를 쓰고 나누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