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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칼라책방 Apr 08. 2023

야간 당직

요즘에도 당직이라는 근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제가 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한 지가 오래되었네요. 당직 근무는 모든 직원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맡았습니다. 주말 당직과 야간 당직 두 종류가 있었는데 오늘의 이야기는 평일 야간 당직 때 있었던 일입니다.


오후 6시가 지나자 직원들이 하나둘씩 퇴근을 했습니다. 4층에서 가방을 챙겨 당직을 서기 위해 3층 사무실로 내려왔습니다. 따로 마련된 당직자 자리가 없었기에 저는 상담 테이블에 앉아 서류 파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야간 당직은 보통 둘이서 짝꿍이 되어 근무하는데 그날 저는 물리치료사 A 선생님과 함께였습니다. 물리치료실은 별도로 구분되어 있고 치료 시간도 정해져 있어서 물리치료사들은 다른 직원들과 마주칠 기회가 적었습니다. 게다가 저처럼 다른 층에서 근무하는 직원들과는 눈인사가 대부분이었으므로 A와 저는 조금 어색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직원도 이용자도 없는 복지관 건물에서 둘이 순찰도 돌고, 저녁도 먹으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직 시간이 한참일 무렵 저는 서류 정리를 마치고 책을 읽고 있었고,  A는 조금 무료했는지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 문쪽으로 가셨다가 급히 돌아서며 저를 보고 "선생님, 누가 와요!"라고 하셨습니다.


올 사람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A는 그 자리에 서 계셨고 저는 엉거주춤 일어났습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방문자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생김새가 약간 다른 동양인이었습니다. 영어, 영어로 말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A와 제가 눈빛으로 나누었습니다. 


우선 안녕하시냐고 인사를 한 후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우리의 걱정대로 그분은 영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영어는 영언데 그분도 모국어가 아니어서 발음이 매우 서툴렀습니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고 단지 영어라는 것만 알아차린 정도였습니다. 큰일입니다. 이분께서 장애인복지관에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온 이유가 분명 있었을 테니까요. 당직 짝꿍과 저는 서로 "선생님.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겠어요?"라고 물었고, 잘 모르겠다고 답을 했지요. 막막했습니다. 


순간 제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연수까지 다녀온 친구가 있었거든요. 딱! 손가락을 튕기며 그분께 잠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자그마치 영어로 말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허허. 잠시 후 영문과 친구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 친구야! 나 지금 당직서고 있는데 외국인이 찾아와서 뭐를 도와달라고 하는 것 같아. 네가 얘기 좀 들어봐 줄 수 있어?"


그 친구는 외국인을 바꿔 달라고 했습니다. 수화기를 들고 영문과 친구와 통화하는 외국인을 당직자 둘이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손을 모으고서요. 제발 해결되기를 바랐거든요. 그 외국인은 처음에는 읍소하는 목소리였는데 조금씩 표정이 바뀌는 것 같았습니다.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 당황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아... 궁금해라. 외국인이 잠시 말을 멈춘 틈을 타서 전화기를 달라고 제가 손을 뻗었습니다. 수화기 너머 영문과 친구에게 이 사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경혜야, 그 사람 돈 달래. 이만 원을 달라는데 내가 그 돈이 왜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계속 딴소리만 해. 그래서 내가 그냥 가라고 했어. 할 일 없이 돈을 왜 달래?"


친구의 말인즉슨, 돈을 얻으러 온 것 같으니 그냥 돌려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땅한 이유도 대지 못하고 말을 빙빙 둘러대는 거 보니까 특별히 급한 일도 없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았다고, 고맙다고,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을 하고 돌아서니 그 외국인은 벌써 나가고 없었습니다. 외국인을 찾던 내 눈길은 당직 짝꿍과 마주쳤고 그 선생님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A에게 '내 친구가 이러저러한 것 같다더라'라고 말을 전했습니다. 설명을 들은 A는 "어쩐지. 경혜쌤이 전화받자마자 도망가는 것처럼 나가더라고!"라고 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저녁 9시가 다 되어서 우리는 당직 마무리를 했습니다. A가 당직 일지를 쓰는 동안 저는 3층 사무실 창문을 닫고 잠겄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퇴근했습니다. 


다음날 복지관에 출근을 하니 어젯밤 소동... 소동이었을까 싶지만 복지관 직원들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었다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A가 적은 당직 일지 때문이었습니다. 일지 맨 밑에 있는 '특이사항'에 외국인이 찾아와서 돈을 달라고 했는데 우리 둘이 잘 이야기해서 보냈다는 글을 굉장히 길게 적어 놓았습니다. 보통은 '이상 없음' 네 글자가 다인 칸이었는데 아마도 당직일지를 적기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A는 치료 시간이라 물리치료실 안쪽에 있었으므로 직원들은 저를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궁금했으니까요. 저는 마치 무용담을 들려주듯 '그래서 말이야~ 그래 가지고~! 그랬던 거 아니겠어!!'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다 들은 직원들은 앞으로 당직 설 때 그런 일이 또 있으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면서 영문과 친구를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두 배로 사'라는 제목은 저의 딸아이가 의사, 변호사, 판사가 좋은 직업이라면 회복지는 '사'가 두 번이나 들어가므로 두 배는 더 좋은 직업이라고 하면서 사회복지사 엄마에게 지어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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