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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형 E

월급만 준다면 e도 E도 가능합니다

by 미칼라책방

나의 타이틀은 '글 쓰는 사회복지사'이다. 글 쓰는 것도 좋고 사회복지사는 더 좋다. 사회복지사라는 제목은 사회에 처음 발을 내딛으며 가졌던 직함인데 그 직장을 그만두고도 나는 사회복지사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 깊이 새겼던 것 같다. 아이들을 키우며 아동복지에 대해 고민하고, 살림을 하며 가족복지를 실천했다. 무엇보다 사회복지를 가르치는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노동복지 현장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일을 한다는 건 돈을 번다는 의미와 같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은 끊기지 않아야 한다. 매 학기마다 계약을 하는 시간 강사는 파리 목숨과 같다. 파리라도 계속 날면 살 수 있다. 학기말에 실시하는 강의 평가로 날개를 달고자 했다. '그 선생, 참 잘하더라.'라는 평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한마디를 동아줄 삼아 다음 학기에도 급여를 받을 수만 있다면 내향형 인간은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다.


부끄럽고 어색한 강사는 저리 가라!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농담을 검색해서 달달 외웠다. 배우가 대본을 외우듯 나는 강의 내용을 깨알 같이 적었다. 3학점 강의에 들어가는 나의 스크립트는 A4 대여섯 장이었다. 보지 않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지만 강의실에만 들어가면 이상하게 머릿속이 하얘졌다. 앞에 앉은 수십 명의 괴물들이 "얼마나 잘 외웠는지 보자꾸나!"라며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고 했다. 실수하면서 능숙해지는 거라고 했다. 나의 강의를 초반에 들은 수강생들에게 미안하다. 그들은 내 강사 경력의 희생양이었다. 극내향에서 생계형 외향으로 바뀔 수 있는 목적과 목표가 되어 준 그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나의 목적은 사회복지사로 살아가는 것이었으며, 나의 목표는 강의 평가 5점 만점에 5점을 맞는 것이었다. 충분히 이뤘으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향을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몇 %의 외향을 끌어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을 뿐이다. 시도와 실패와 노력과 성공이 있었다. 필요에 따라 내향의 가면과 외향의 가면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집에 가면 양말 벗고 침대에 누워 혼자만의 세계를 누리지만 밖에서는 변검술사가 되어 e도 될 수 있고 E도 될 수 있다. 월급만 준다면 뭐든 못하리.


얼마 전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 모임을 벗어나 둘이 따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찌리릿~ 알아차렸다. 나와 같은 유형이라는 것을.


"생계형 E라고 아세요?"

"혹시 선생님도?"

"큭큭. 우리 같은 과네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해 말하는 걸 듣고 알게 되었다.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이 생명줄과도 같다. 밖에서 무엇을 하든 집에 오면 핸드폰을 충전하듯 나를 충전하는 시간이 있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 코드를 꼽는다.


나야, 오늘도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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