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칼라책방 Apr 11. 2021

아빠의 왼손을 위해 역주행을 강행한 택시

목수와 그의 아내 - 28

목수라는 직업은 고운 손과는 거리가 멀다. 날카롭고 뾰족한 자재들로 인해 우리 아빠의 손은 늘 거칠고 투박하다. 나는 그런 아빠의 손이 자랑스럽다.


대학교 2학년 때 과외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오니 아무도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하니 병원이라고 했다. 


"엄마~ 어디야?"

"병원."

"거긴 왜 갔어?"

"미칼라. 아빠가 다치셔서 수술해야 해. 동생들이랑 저녁 잘 챙겨 먹고 있어."


아빠가? 왜? 어딜? 아직 많은 질문이 남았는데 엄마는 전화를 끊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온 동생들이랑 라면을 끓여 먹고서 아빠의 소식을 전했다. 우리 삼 남매는 엄마 아빠 없이 지내는 밤이 처음이었다. 밤을 하얗게 지새울 만큼 걱정되었지만 우리는 잠이 들었고, 아침에 각자의 학교로 갔다. 

아빠는 손을 다치셨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고 했다. 손을 다쳤는데, 다리도 아닌 손인데 왜 집에 안 오시나 의아했다. 주말에 아빠에게 가기로 했지만 주말이 되기 전에 아빠가 집으로 오셨다. 왼손에 머리만 한 붕대를 감고 오셨다.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였다. 

걱정과는 다르게 아빠는 괜찮다시며 다음날 새벽부터 바로 일을 나가셨다. 나는 이상했다. 분명 많이 아프다고 했는데,,, 일 가신 걸 보니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이만 성인이었지 생각은 그것밖에 하지 못했다. 가장이면서 목수였던 우리 아빠는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아빠~! 그때 아빠 손 다쳤을 때 나는 기억이 잘 안 나."

"이틀인가 삼일인가 만에 바로 퇴원해서 그럴 거야."

"왜 그렇게 빨리 퇴원했어?"

"일해야지. 일을 해야 모든 게 돌아가지."


가족뿐만 아니라 일터도 책임지고 있었던 아빠는 그 무게로 인해 누워있는 병원이 가시 동굴과 같았으리라. 


라디에이터 박스를 만들다가 전기톱에 손이 딸려 들어간 거야. 바로 연세 정형외과를 갔는데 안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손가락을 싸 들고 빈센트 병원으로 갔지. 응급실에서 의사가 내 손가락을 이리 붙였다가 저리 붙였다가 하는 거야. 그러더니 그 자식이 안 되겠다고 다른 병원으로 가라는 거야! 아이고! 얼마나 아픈지 욕이 막 나오는 거야. 못하겠으면 건들지나 말지!


삼십 년 전이니 응급실 의사가 어땠을지 상상이 되었다. 아빠는 의사라고 또 얼마나 신뢰를 했을까. 큰 병원 의사라고 꾹 참고 있었는데 아파 죽겠는 손을 조물락거리더니 결국 안된다는 말을 듣고 아빠는 화가 많이 나셨을 거다. 삼십 년이 지나 그 얘기를 듣는 나도 화가 났으니까.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갔지. 그런데 이 택시 기사가 남태령 고개에서 중앙선을 넘어가지고 역주행을 하는 거야. 손이 아니라 교통사고 나서 죽을 것 같더라고. 아!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기사가 한다는 말이 "경찰이 빨리 따라 붙으라고요!" 라고 하는 거야.


경찰 눈에 띄기 위해 역주행을 했던 택시는 경찰을 못 만나 곧장 방배경찰서로 직행했다. 경찰서를 들이받을 듯 달려오는 택시를 보고 놀란 경찰관들은 피로 벌겋게 물든 붕대를 왼손에 달고 있는 아빠를 발견하고 더 놀랐다. 

택시에서 경찰차로 갈아탄 아빠는 중앙대학교 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거절당했다. 접합 전문 의사가 없으니 차라리 접합 전문 병원으로 가는 것을 권했다고 한다. 몇 군데의 병원을 거칠 만큼 그리고 그곳에서 모두 안된다고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할 만큼 손가락의 상태는 좋지 않았던 것이다. 겨우겨우 찾아간 곳은 접한 전문도 맞았고, 손가락도 치료 가능하지만 아빠더러 급하지 않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네? 선생님 저 너무 아픕니다."

"환자분! 여기 더 급한 환자가 몇 분 계세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돌아보니 아빠 눈에는 손가락이 아닌 팔이 절단된 사람, 다리가 없는 사람이 보였다고 한다. 차분히 기다린 아빠는 수술을 잘 받으셨지만, 네 번째 손가락의 한 마디는 결국 살리지 못했다. 시간도 너무 지체되었고, 톱날에 많은 부위가 뭉개졌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정도 치료만 잘 받으면 신경이 살아날 거라고 했지만, 양쪽 어깨에 가정과 현장을 짊어지고 있던 아빠는 그 날짜를 다 채우지 못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빠는 날씨가 차가워지면 손가락부터 신호가 온다. 아프고 저린 손가락을 호호 불고 주물러서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게 하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작가의 이전글 운전수도 없이 굴러가는 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