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래도 Jun 21. 2024

화장발

1. 제 전공이나 직업 특성상 대학 때부터 동료들까지 여성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다 보니 본의 아니게 화장 전, 후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 꽤나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절대 화장 전이 이상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저 역시 그렇지만 우리는 보이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평가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직업, 학벌, 사회적 지위, 외모, 혹은 보이는 행동이나 말들이 그 사람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게 그 사람의 전부라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오해할 필요도, 잘 보이기 위해 포장하거나 감출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것들은 쉽게 보이지만 사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은 쉽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어떤 마음들은 누가 알아차릴까 걱정하며 꽁꽁 싸매기 때문입니다.


2.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심리상담센터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심리상담을 공부하고 들어간 첫 직장이었습니다. 배운 것을 가지고 일을 한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돈을 받고 심리상담한다는 것이 부담  되었습니다. 내가 돈 값(?)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되었습니다. 심리상담 의뢰서를 전달받았습니다. 제 인생에 첫 내담자였기 때문에 기대를 갖고 의뢰서를 열었습니다. 간단한 인적사항과 법정시설에서 의뢰가 된 내용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읽어 내리다 "특수강간"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3. 온갖 생각들이 교차했습니다. 만나기 전부터 온갖 선입견으로 똘똘 뭉친 꼰대가 되었습니다. 범죄자 인상에 거칠고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만나기 전까지 온갖 선입견으로 가득했고, 만나서 상담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만나기 조차 싫은 마음이 컸습니다. 약속된 상담일이 되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나보니 선한 인상에 모범생 같은 외모였습니다. 말투나 외모, 풍기는 인상 어디에서도 그런 일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선한 인상과 달리 분명 그럴만한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피해자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얘기를 먼저 꺼냅니다. 수작 부리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 생각이 편견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작에 넘어가지 말자, 정신 차리자 생각했습니다.


4.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수작이라기보다 내 편견이겠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수작이라면 고등학교 남자아이가 부리기엔 너무 노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믿지 말자 생각했습니다. 살아온 얘기를 묻고 들었습니다. 얘기를 들을수록 제가 큰 오해를 한 것 같았습니다.

들려준 얘기는 이러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은 이혼하시고 아버지와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지방에 계셔서 주말에만 만날 수 있었는데 워낙 엄격하고 완벽주의적인 요구를 하신 분이셨습니다. 본인이 인생에서 실패를 모르고 살아오셨던 분이라 자녀에게도 그러한 요구를 한 것 같았습니다. 실패를 모르고 살아오신 분에게 자식의 성폭력 사건은 도저히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너무나 과한 표현들을 자식에게 쏟아내셨습니다. 아이에게 가장 상처가 되었던 말은 "강간범 새끼"였습니다.


5. 제가 듣고 이해한 것은 초등학교 때 부모의 이혼 등 여러 어려웠던 상황에서 표면적으로 무난하게만 보낸 것이 문제로 보였습니다. 잘 힘들어하고, 애도하는 과정이 없어 보였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업격한 기준으로 표현 못하고 눌러 놓을 수밖에 없었던 분노가 성폭력 사건으로 표현된 것 같았습니다. 우선은 충분히 표현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았습니다. 잘 듣는 것 이외에 제가 무얼 할 수 있을지도 잘 몰라 그저 듣기로 했습니다.


6. 6개월 정도 상담시간에 만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울음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울음에는 원망, 슬픔, 죄책감 등 어린 나이지만 온갖 삶의 애환이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태어나 누군가 앞에서 우는 것이 처음이라는 말에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한편으로 만나기 전부터 온갖 선입견으로 무장했던 내 모습이 너무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의 행동들이 옳거나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는 면이 그 사람의 전부 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구나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행동이나 모습들은 결국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행동을 바꾸는 것보다 그 너머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 상담에서  교훈을 얻었습니다.


7. 이전보다는 덜 하지만 여전히 '화장발'에 속게 되는 저를 마주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 친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 잡습니다. 분명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겠지,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내가 아직 이해 못 한 점이 많아서일 거라고.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대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니,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 같습니다. 제가 '특수강간'이라는 단어에 꽂혀 온갖 편견으로 똘똘 뭉쳤던 것을 보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누군가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잘 모른다는 사실 뿐인 것 같습니다.

이전 03화 질문이 많은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