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의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꼽히는 틱낫한은
책 ‘마음을 멈추고 다만 바라보라’에서 인간의 번뇌를 사라지게 하는 불교 명상법을 소개한다.
‘멈추어 고요하기’와 ‘깊게 꿰뚫어 보기’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불행이 생기는 등으로 고통이 가득한 마음이 일어나면
일단 그 마음에서 한 걸음 빗겨 서서 제목 그대로 그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이 일으키는 고통에 집중하는 대신,
그 마음이 어째서 생겼는지를 깊게 꿰뚫어 보는 것이다.
명상자는 하나의 깨달음을 향해 간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세상 모든 것이 덧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세상만사가 그렇듯 고통도 공허하다는 깨달음이다.
나는 선불교의 이러한 명상법을 좋아한다.
다들 그렇듯 살면서 끊임없이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을 겪는데
그 원인을 알게 되는 순간 그 고통이 경감되기 때문이다.
한 발짝 물러나서 고통을 바라보면 그 원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가령 갑자기 우울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왜 무기력해졌지? 왜 화가 나지? 왜 질투심이 일지? 어째서 심장이 두근거리지?
우리는 대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정확한 형체를 모른다.
그러나 가만히 멈춰서 고요하면
그 감정들은 앞으로 지나가고, 결국 그 감정이 생긴 원인까지 보게 된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런데 이것 외에도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선불교의 명상법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명상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관장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조차 말이다.
선불교에는 신이 없다.
명상의 목적은 생이 공허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끊임없이 반복되는 윤회를 끊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인 나는 당연히 윤회를 믿지 않고
세상이, 고통이 공허하다는 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감정에도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의도를 위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신다.
가령 사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매번 이성을 잃고 화를 내게 만드신다.
이때 삼손이 느낀 화의 감정은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한 블레셋 사람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어쩌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 있을 수 있다.
그 목적은 삼손처럼 어떤 행동을 바라시는 목적일 수도 있고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일 수 있다.
그렇기에 내가 명상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셨을지도 모를 감정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그 감정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기 위해서다.
물론, 우리의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서 움직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께서 움직이셨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감정이 있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감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사소한 감정조차 중요하다.
이러한 감정은 어째서 일어났는가.
나에게 이 질문은 이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 감정을 통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명상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명상을 한다고 해서 일어날 것으로 예정된 일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명상을 할 때
나는 하나님을 한 번 더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더 돌아보게 된다.
다름 아닌 그것이 곧 깨달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