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데 익숙한 느낌으로

여행기록_나에게 돌아가는 길

by 초록테이블

아.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날.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뒤엉켜 있다. 아쉽고 조급하고 피곤하다. 이른 오후 비행기이니까 11시에 나서면 되겠지, 미리 짐을 챙겨두고 마지막 아침식사를 하러 나선다.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하니 아주 맛있게 잘 먹어야겠다는 의지가 샘솟는다. 의미를 부여하는 걸 좋아한다.


확실히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어제 갔던 딴삥 식당에 다시 간다.

"안녕하세요! 저 또 왔어요~" 알은체를 하니 사장님도 반갑게 맞아주신다.

"오늘은 뭐 먹을 거예요?"

"오늘은 구층탑(九層塔) 오믈렛 먹을게요."



사실 처음 보는 메뉴인데 이름이 멋있어서 시켰다. 구층탑 오믈렛이라면 어떤 걸까 예상해 본다. 뭔가 9층으로 쌓아져서 나오는 건가? 그런데 가격이 어제랑 같은 50 TWD인데? 뭐가 더 쌓아져 있으면 더 비싸야 하는 거 아닌가?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있는데 음식 등장!


"어, 사장님? 이거 구층탑 오믈렛 맞아요?"

"응. 맞는데, 구층탑 시켰잖아요."

"구층탑이 뭐예요?"

"응? 여기 들어간 이게 구층탑이지."


뭔가 바보가 된 기분. 그렇다. 구층탑은 채소 이름이었다. 찾아보니 허브종류라는데 진한 깻잎 같기도 약한 고수 같기도 한 향이 난다. 맛있다. 역시 모르는 음식 도전하길 잘했다.


"혹시 잘못시킨 거예요?"

"아니요. 맛있어요. 엄청 맛있어요."


맛있는 음식과 환대에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 자리에서 구글 리뷰를 쓰고 보여드렸다. 서로에게 엄지 척을 날리며 인사를 나눴다. 다시 꼭 가야지.



식사를 마치고 구글맵에서 찾은 카페로 향한다. 차도를 하나 건너고 골목 한 블록을 걸어가니 아담한 동네카페가 보인다. Gold Anchor Coffee. 편안한 음악과 심플한 공간이 멋스러운데 그중 사장님의 미소와 친절도가 한도초과다. 내가 중국어가 서툰 것을 눈치채고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열심히 커피를 설명해 주신다. 안타깝게도 나의 중국어와 영어의 수준이 그게그거라 크게 도움은 안된다. 어르신 세 분이 바에 앉아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고,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도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신다. 어르신 두 분이 빠지고 다른 어르신 두 분이 등장했다. 사장님과 손님들이 오며 가며 작은 목소리로 스몰톡을 나눈다. 10월 1일 수요일 오전 9시, 가오슝의 작은 커피숍의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든다. 아무 데서나 마시지 않길 잘했다.


골목 사이사이로,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길과 건물을 둘러보며 숙소로 돌아왔다. 낯선데 조금 익숙한 느낌이 든다. 짧지만 이 동네에서 살다가는 것 같다. 이 동네 사람처럼 문화센터를 돌며 러닝을 하고 작은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편의점에서 주전부리를 사고 골목골목을 걸은 시간이 좋았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여행인가 보다. 그래서 힘들어도 걷게 되는 것 같다. 걸을 때면 더 잘 느끼고 보고 듣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슝 지나가버리면 생각도 감정도 날아가버려 붙잡아두기가 어렵다.

아, 알겠다.


좋을 때는 천천히 걷기.

속이 상할 때는 그 기분들에 붙잡히지 않도록 빠르게 달리기.





호텔에서 11시에만 나가도 충분하다는 걸 알지만 괜히 조급한 마음을 가지기 싫어서 10시 30분이 넘자 주섬주섬 챙겨서 방을 나선다. 생각해 보니 체크아웃 때까지 옷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뒹굴거려도 되는 건데, 어째 여행하는 내내 한 번을 안 했다. 원래 집에서도 꼭 잠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여행하는 내내 침구는 깔끔하게 해 두고 여행가방은 옷장 안에 넣어두고 지냈더라. 새로운 기분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은 것도 단정한 내 모습도 좋았다.


체크아웃을 하면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지하철역 출구가 있는지 직원에게 물었다. 가오슝을 돌아다니면서 본 지하철역들은 엘리베이터가 거의 없고 에스컬레이터도 올라오는 것만 작동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있나요?"

"네 있죠."

"없던데요. 몇 번 출구예요?"

"4번 출구가 제일 가까워요."

"4번 출구에 엘리베이터 없던데요?"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일단 고맙다고 하고 호텔을 나섰는데, 아차! 내가 말실수를 하고 있던 거였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하철에 지하철이 있나요?"

"4번 출구에 지하철 없던데요?"


지하철의 중국어 발음은 디티에, 엘리베이터의 중국어 발음은 디엔티. 나는 계속 지하철만 반복하고 있었던 거다. 그 직원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지. 실수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혼자 푸핫하고 소리 내 웃었다.


가오슝은 공항이동이 편해서 좋다. Red Line을 타고 30분도 안 걸리니 여행의 질이 달라진다. 가오슝이 익숙하다는 듯 괜히 전자책을 꺼내 읽었다. 금세 공항에 도착해 티웨이 부스 앞으로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젊은 남자직원이 습습후후-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마치 처음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긴장되는 모양새다. 그리고 그와 첫마디를 나누면서 어쩌면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짐을 올리고 태그를 붙이는데 기존 태그를 제거하지 않아서 허둥대더니,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이미 했는데 나를 쫓아 달려 나와서는 짐 티켓을 전해준다. 처음인 것 같으니 나는 최선을 다해 친절한 표정을 장착하고 미소를 건넸다. '살다 보면 불편하다고 바락바락 대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하지만 다정한 사람은 항상 있단다.' 속으로 이런 대사를 던지면서. 나까지 불편함을 하나하나 짚으며 따지고 싶지 않다. 인생은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니까. (소설 순례주택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게이트를 통과하고 일단 남은 시간을 버티기 위해 카페를 찾는다. 타이완 쌀로 만들었다는 글루텐 프리 바스크 치즈케이크와 뜨거운 라떼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 노트를 끄적이고, <새의 선물>을 읽는다. '고운 정은 열심히 하면 들 수 있지만, 미운 정은 노력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는 문장이 나온다. 속마음을 내보이거나 하고 싶은 대로 막 할 수 없는 어린 주인공을 보면서 짠해진다. 나는 아이와 꼭 고운 정과 미운 정을 넉넉하게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헛헛한 마음에 괜히 포켓몬고 게임을 켰다. 알에서 판짱이 나왔다. 대만에서 판다 포켓몬이 나오니까 뭔가 운명 같아서 파트너로 설정했다. (타이베이 마스코트가 흑곰이다.) 판짱은 나 덕분에 대만에서 출발해서 같이 서울로 가는 여행을 하게 되네.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비행기를 타고 한번 졸고 책을 조금 읽으니 한국이다. 금방이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5호선을 타고 2호선을 갈아탄다. 공교롭게도 퇴근시간이라 사람들이 어깨에 부딪힌다. 한국에 온 게 체감된다. 지하철역에서 같이 살고 있는 두 명의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두 팔을 크게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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