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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해 Oct 30. 2020

신경 끄고 우아 떨기

 나는 ISFJ 성격유형이다. 최근 엄마들 사이에 유행한 성격유형 검사인 MBTI의 결과이다. ISFJ는 '용감한 수호자'라는 별명이 있다. 내향적이지만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배려하는 걸 좋아해 이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고 한다. 결과를 받고는 나의 성격과 딱 맞아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의 눈치 잘 보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나. 계획에 맞춰 생활해야만 하는 피곤한 성격이다. 설거짓거리가 쌓여있으면 답답해서 내가 먼저 한다. 남편이 해 놓은 집 안 청소가 마음에 안 들면 남편이 기분 나쁠까 봐 말도 못 하고 몰래 다시 하곤 했다. 외출할 때도 '남편은 아이들 돌보기에 미숙하니 내가 돌보고 말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나 혼자 전전긍긍하며 아이 둘 손을 잡고 산책을 한다. 혼자 힘들어하고 속으로 삭이는 답답한 스타일. 최선을 다한 나를 위로하며 애들 재워놓고 맥주 한 잔으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왜 그렇게 남들을 배려한답시고 나의 마음을 무시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없어도 아이들은 평상시대로 밥 먹고 학교 가고 뭐든 다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남편은 못 할 거로 의심했다. 힘들까 봐 쓸데없는 이타심을 발휘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육아와 집안일은 나의 몫이 되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에라도 내 안의 나를 배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남편과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자.

 

내가 없어도 가정은 돌아간다.



 가을 날씨가 화창한 날, 돗자리와 공을 가지고 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평소 같으면 간식거리를 잔뜩 들고 갈 텐데 그날은 내가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들고 나갔다. 남편에게 용기를 냈다. 오늘은 돗자리에 앉아 나 혼자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그렇게 하라고 말하며 아이 둘과 함께 멀찌감치 떨어져 공놀이를 했다. 나는 늘어지게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혼자 앉아 있으니 살살 부는 바람이 느껴지며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멀리서 뛰놀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은 텔레비전 속에서 움직이는 영상처럼 느껴졌다.


 20여 년 전 여행했던 런던이 떠올랐다. '하이드 파크'에서 여유를 즐기며 잔디에 누워서 독서를 하는 사람들. 내가 앉아 있는 곳이 런던의 공원이고 나는 런던의 시민 같았다. 공원의 한적함을 최대한 즐기고 싶었다. 휴대전화로 '책 읽기 좋은 클래식'을 검색하여 틀어 본다. 평소 클래식을 듣지도 않는데 그날은 왠지 우아를 떨고 싶었다. 나무 그늘서 음악을 들으며 <모네, 일상을 기적으로>라는 책을 펼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를 주제로 쓴 책이다. 책장을 넘기며 모네의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 황홀하다. 모네의 풍경화를 보니 내가 앉아 있는 공간이 모네의 작품이다. 에메랄드빛 하늘과 핑크빛 바람이 느껴진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동안 모질게도 왜 내가 모든 걸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남편은 몰라 그렇지 내가 말하면 뭐든 들어주는 너그러운 사람일지 모른다. 남편을, 아이들을 너무 배려하지 말자. 내가 나서서 하지 않아도 모든 일은 순조롭게 흘러간다. 가끔 공원에서 아이들은 아빠와 신나게 놀고 나만의 시간을 즐겨보자. 여유로운 공기를 느끼고 생기 있는 나를 만나보자.


주변은 그만 신경 쓰고 내 안의 '나'를 배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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