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이슬이 맺히는 때
'찬 이슬'이란 뜻의 한로를 맞으며 고민했었다. 한로?! 이슬에 대한 글을 쓴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이슬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절기를 나누는 중요한 요소인 걸까. 썩 내켜하지 않으며 마땅히 글감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밍기적 밍기적대며 2주를 보냈다. 그 사이 피어나는 국화들을 보며 역시 한로엔 국화인가 그런 생각도 하면서.
* 한로와 비슷한 시기인 중양절엔 국화차를 마시고 국화전을 먹는 등 국화와 관련된 문화가 있다.
하지만 나는 국화차를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국화에 대한 추억이라곤 대학시절 학기마다 다니던 원예, 화훼, 정원 박람회에서 이쁘게 키워놓고 순지르기한 국화뿐이다. 작품이 되기 위해 애써 가꿔놓은 국화들 말이다.
* 순지르기: 다수의 꽃대를 만들거나 꽃의 크기를 조절하기 위해 가지를 잘라내는 것
그래서인지 틀에 갇힌 국화를 보며 이쁘다 생각한 적이 없다. 어떨 땐 화단에 심긴 저 국화가 본래의 모습일까 싶다. 글을 쓰는 지금도 머릿속에 그 국화들을 떠올리니 입을 삐죽거리게 된다. 국화가 맘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획일화된, 인간이 원하는 대로 빽빽하게 모양을 만들었어야 했을까 싶은 불편함 때문에.
빠글빠글 빠마머리처럼 빽빽하게 자리 잡은 국화는 물론 탐스럽다. 이 계절, 꽃놀이와 단풍놀이를 다니는 중년의 핸드폰 카메라가 머무는 곳도 단연 국화일 거다. 향기도 좋고. 그리고 나도 국화 앞에서 쪼그려 사진을 찍는다. 빠마머리가 아닌 한들한들 자유로이 흔들리는 산국 앞에서. 옹기종기 또는 띄엄띄엄 작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노란 꽃은 미소를 띠기 적절하게 사랑스럽다.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그 산국들을 보니 중양절에 국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만했겠구나 이해된다. 그 시기만의 향긋하고 사랑스러운 에너지를 온몸에 담고 싶었을 테니. 그래서 차를 우려 향을 채우고 먹고 국화잠이란 비녀로 장식하기도 했을 거다.
마치 오늘 만난 아이들처럼. 마음에 드는 식물 한 가지만 골라오라는 말에 벌개미취를 뜯어와 내게 주고 싶다는 아이처럼, 구절초를 뜯어 머리핀과 함께 꽂은 아이처럼, 노란 국화를 손에 고이 쥐고 향이 좋아 마실 수 있냐고 묻는 이처럼.
화단에 심긴 국화들을 떠올리면 여전히 내 입은 삐죽거리고 있지만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자라고 존재하는 산국은 내게 편안한 마음을 준다. 뚜렷이 티 나거나 잘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누군가에게 따뜻한 기억을 만들어 주는 모습이 나의 추구미라.
그래서 오늘을 기억하며 경쟁에 치열한 우리나라에 살아가고 있는 나와 나와 같은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화단에 심긴 똑같은 빠마머리의 국화가 아닌 아주 작아도 그 자체로 사랑스러운 산국을 기억하자고. 남들과 똑같아질 필요 없다고. 순지르기를 하며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내 모습을 사랑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