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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극한직업 1순위, 보부상 이야기

by 영풍석포제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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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걷는 거리만 16km, 어깨에 싣고 다니는 짐은 25kg, 조선 팔도 장이 열리는 곳에는 다 나타나며 온갖 병란이나 왜란에 용역으로 투입되었다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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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이들을 보고 우리는 보따리 장수, 보부상에 비유하죠. 그럼 진짜 보부상들은 짐을 얼마나 많이 갖고 다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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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이라는 말은 보상과 부상이 합쳐진 말입니다. 짐을 싸고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데요. 부피가 작고 값나가는 물건을 파는 보상은 금이나 은, 비단, 명주, 모시, 면화 등 장신구나 귀중품을 주로 팔았습니다. 부피가 크고 값싼 물건을 파는 상인인 부상은 생선, 소금, 나무그릇, 질그릇, 무쇠 등 생활용품을 주로 판매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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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불꼬불한 산길과 전국팔도를 누비며 장돌뱅이라 불렸던 이들은 파산한 농민, 몰락한 양반, 노비 출신이었습니다. 농사지을 땅마저 없던 사람들의 최후의 선택지였던 것이죠. 상업을 천대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도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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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상인 조합이 바로 보부상들을 통해 만들어졌는데요. 서양으로 치면 길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사실 서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건데요. 힘없는 보부상단을 유지하기 위해서일까요? 이들에겐 체계적이고 엄격한 규율이 존재했습니다. 보부상단은 한양의 중앙본부와 지역단위 본부인 임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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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만나면 각자의 소속을 밝히며 인사를 했고, 장에서 우연히 만난 보부상과 친해지면 저고리를 바꿔 입는 풍습이 있었어요. 개인의 이익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문화가 엿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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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하면, 목화솜을 단 패랭이가 떠오르는데요. 패랭이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서 엮은 겁니다. 조선시대에 주로 신분이 낮은 양민이나 천민들이 쓰고 다녔던 모자에요. 조선 말까지 양반들에게 ‘상놈갓’으로 비아냥 받았는데요. 역졸이 쓰고 다닌 모자도 겉면을 까맣게 칠한 패랭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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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의 패랭이는 양쪽에 큼직한 목화솜을 달고 있죠.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어요. 고려 말, 장군이었던 이성계는 변방에서 부상을 당합니다. 그때, 한 보부상이 목화솜으로 응급치료를 해주었는데요. 이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것을 기념하여 패랭이 왼편에 목화솜을 달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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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또한 병자호란 때 피난을 가던 중 보부상의 솜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패랭이 오른쪽에 달린 목화솜이 된 거죠. 실제로 보부상은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군과 협력해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임진왜란, 병인양요 당시 보부상들은 어명에 의해 혹은 자발적으로 참전하였습니다. 물자수송과 응급구조, 첩보전에 큰 활약을 보였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생선, 소금, 토기, 목기, 무쇠의 독점권을 얻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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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보부상단은 시장을 장악하는 대형조직으로 성장합니다. 대한제국 시기부터는 상무사 명칭으로 바뀌었고, 황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단체로 재편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1905년 일제 통감부에 의해 상무사가 강제 해산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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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내 전국을 발로 뛰며 살아온 봇짐장수와 등짐장수, 보부상. 막연하게 장사꾼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들의 역할을 조금은 제대로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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