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에 놓은 지갑

-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by 이지현


식탁 위의 존엄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중에 한 구절,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중학교 이전인가,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그렇게 서러운 삶은 어떤 것이었을지, 버지니아 울프가 도대체 누구인지 그게 더 궁금했다. 이 시를 가르칠 때 가수 박인희의 시낭송을 즐겨 틀어주면, 아이들의 반응은 시낭송보다 예전의 나처럼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만 궁금해했다. 아무래도 그 또래 아이들의 호기심은 언제나 비슷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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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우리가 아직 일제 식민지였던 해, 양쪽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우즈 강으로 걸어 들어가 자살한 여류작가 울프, 그래서 더 서러워진다. 『자기만의 방』은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저자가 요청받았던 강연 내용에 더 보필하여 쓴 글이다. 저자가 페미니스트란 것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말해서 패스하고, 이제 이 책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여성이 스스로 왜 자신의 지위를 찾아야 하는지를 다양한 비유로 설명하는 점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지 이 책이 말하는 것을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이 책은 그 얘기에 대한 것이 다니까.


먹는 것으로 남녀가 차별을 받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먹는 것으로 남녀든 아들딸이든 차별을 받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우리 사회도 오랫동안 아들은 아버지와 밥상을 같이 공유했지만 딸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들에게 차리는 상은 생선 하나라도 더 올랐지만 딸들의 밥상은 부뚜막에서 해결되기도 했다.


음식 투정은 금기라고 어릴 때부터 배웠고, 밥상머리에서의 반찬투정은 속 좁고 소갈딱지 없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고, 그냥 주는 대로 먹으면 되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누구나 눈치껏 알았다. 많은 형제들 틈에서 누구의 밥상에 흰쌀밥이 수북한지. 생선이 꼬리 토막이 놓였는지 가운데 토막이 놓였는지에 따라서도 형제간에도 인권은 나뉘었고, 부모가 어느 자식을 존중하는가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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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시대건 우리의 시대건, 남녀 차별의 문제는 인간의 존엄함과 관련된다. 태어날 때부터 존엄함을 부여받지 못하고 자란 딸이 이 세계를 따뜻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기르겠는지, 혼자서 그 힘을 기르기엔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저자는 400여 편의 비평을 쓴 여류 작가, 의식의 흐름의 수법으로 글을 쓴 개척자,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한 작가, 아버지의 지성과 어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은 귀족 출신의 여성. 이런 수식어들이 뒤따라 다니면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끝없이 문제를 던지는 작가지만, 그녀가 부르짖은 양성성의 존중을 위해 끌어들인 비유가 음식과 잘 다듬어진 잔디밭의 소박한 예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 그러니 저자가 음식 투정을 하고 있다는 투의 말은 말기를.




남녀의 식탁



옥스브리지의 오찬회와 정찬회를 다녀온 후, '왜 남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시는가? 왜 한쪽 성은 그렇게 부유하고 다른 쪽 성은 그다지도 빈곤한가?'라고 묻는다.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 가상의 남자대학 옥스브리지의 오찬 요리는, 깊숙한 접시에 가라앉힌 하얀 크림을 덮은 가자미, 얼얼하고 달콤한 온갖 소스들과 샐러드를 곁들인 메추리 요리, 동전같이 얇지만 딱딱하지는 않은 감자요리, 잎이 장미 봉오리같이 생겼지만 즙이 풍부한 싹 양배추, 큰 바다에서 설탕이란 설탕은 모두 건져 올린 듯한 푸딩, 잔에 끝없이 채워지는 포도주가 나온다.


이 같은 멋진 오찬은 ‘창가 의자에 푹신한 쿠션’ 이 놓인 곳에 차려진다. 이런 음식을 먹다 보면, ‘인생은 좋아 보이고, 산다는 것은 보람이 얼마나 감미로우며, 이런 시기와 질투, 저런 불편 불만이 얼마나 하찮은 것으로 보이며, 우정이라는 것, 마음이 맞는 이들과의 사귐이라는 것이 감복할 만한 것’ 이리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 배부르고 난 뒤면 모든 것에 다 너그러워지고 여유 있다. 남자들은 이런 배부른 풍요와 안락으로 그들의 지위를 더 굳건히 하고 있다고 저자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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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가상의 여자대학 퍼남의 정찬에 나오는 요리는, 접시 바닥이 다 들여다보이는 멀건 수프, 푸른 야채와 감자를 곁들인 소고기, 말린 자두와 커스터드, 비스킷과 치즈, 물로, 남자대학의 오찬보다도 못한 음식이다.


저자가 살던 당시는 말린 자두는 과일에 포함되지 않았다. 만족스럽지 않은 음식은 저자의 친구인 과학자(이를테면 당시로서는 여성의 지위로서는 그런대로 나았던 듯)조차 혀넙치와 메추리 요리를 먹지 못했다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저자는 저녁 식사를 잘하지 않으면 생각도 사랑도 잘할 수 없으며 잠도 잘 잘 수 없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남자대학교의 오찬과 여자대학교의 정찬의 대비로 여성들 스스로 어떤 자각이 꿈틀거리기를 기대했다. 먹는 것으로 남녀차별에 대해 포문을 연 것은 상당히 선동적이고 자극적이다. 헛된 한마디 구호보다 얼마나 세련된 일침 일지, 여성들은 단번에 비참함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마음속에 동요를 일으켰고, 슬픔 같은 것이 고였을 것이다. 이제 갇혀있는 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자각을 저마다 느끼며, 문이 잠겨 못 들어가는 것은 불쾌하지만, 문이 잠겨 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는 것은 어쩌면 더욱 고약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자는 남성들이 누리던 세계로 들어가려는 것보다, 여성들이 갇혀있다는 자각이 먼저이길 바랐다. 저자의 가부장제의 비판은 여성도 인격체라는 수다보다 두 식탁 위에 음식을 차려봄으로써 매우 구체적으로 분노하게 한다.

그래서 『자기만의 방』에 분노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소설가들은 일어나는 일들과 기지 넘치는 말들만 나열하고 있다고 드러내 놓고 비난한다. 소설가들이 그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먹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이제 그 관습을 깨는 도전장을 던지겠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남녀 지위 문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먹는 것에서 차별이 온다고 믿었고, 음식 차별의 문제는 결국 여성의 가난과 직결되어 여성의 지위를 결정한다고 믿었으니, 저자에게 음식은 삶을 드러내는 한 조건이었다.


저자가 대학의 잔디밭에 들어섰다가 대학의 하급관리에게 얻어맞기 직전에 보도로 물러나야 했던 부드러운 벨벳 같았던 그 잔디밭은 300년 전부터 대학 연구원들의 것이었다. 오로지 ‘자갈길이 여자인 내게 허용된 공간’이었다는, 슬픈 자각으로 연설이 시작될 때 그 자갈길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이 걸어온 고난의 길이기도 했다.

저자가 살았던 시대에서 우리는 엄청나게 흘러왔다. 만일 저자가 살아난다면 자신의 집과 방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저자가 말했듯이, ‘우주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동물’인 여자가 서있는 곳이 어디일지, 지금 우리는 그 방에 편하게 들어와 있는지, 왜 우리는 여성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거나, 여성의 지위향상에 대해 각성해야 한다거나, 여성지위와 관련한 법을 개정해야 한다거나, 가족법 개정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거나, 여성은 일을 마치고도 빨리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이란 것 등의 언급을 아직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부유한 식탁에 대한 환상



저자가 500파운드를 상속받은 후, ‘음식과 집과 옷’ 이 이제 영원히 내 것이라고 하면서, 어떤 남자에게도 아첨하거나 어떤 남자도 미워할 필요가 없다고 깨닫는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할 때 여자는 남자에게서 벗어나 당당해진다는 확인이다.


지금 이 시대도 남자들은 여자들이 맞벌이를 해야 한다고 믿지만 실은 속으로 두려워 떨고 나도 그런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보았다. 여성들이 전문직을 가지거나 돈을 더 많이 벌면서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지만, 남자들은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진다고 엄살을 떤다. 사실은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진 게 아니라 이제 그들과 같아져 갈 뿐이다. 그것도 서서히, 아주 서서히.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가 작품을 쓸 종이를 한꺼번에 한 첩 이상을 사들인 여유가 없었던 가난한 여성들에 의하여 쓰였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것 봐, 그런 위대한 여류작가들도 그랬었어, 그러니 나 같은, 이라는 소박한 자기 연민에서도 빠져나오길 저자가 얼마나 간곡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지, 이 책을 읽으면 슬픔이 깊은 우물처럼 고인다.

저자의 서러운 이야기는 바로 그녀의 시대에 여자였다는 사실이었다. 저자가 여성이 지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 안정을 위해서,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안락함과 따뜻함까지 가질 수 있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고 나긋나긋하게 호소한 것은 불과 100년도 안된 일이다.


저자의 남녀 양성 동체론은 미래의 세기에 더 필요한 자각이다. 21세기에도 반대의 성들은 돈이나 물질에 대한 노골적인 소유에 대한 언급은 자신의 가치를 저급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물며 저자의 시대에 물질적인 언급을 통해 여성의 지위를 가지려고 했던 것이 다른 성의 눈에서는 얼마나 괘씸했을지 가히 알겠다. 지금도 그들은 여성에게 돈이란 자식이나 부엌보다도 의미 없는 것이라는 달콤한 철학을 강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성의 영원한 번영을 위한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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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은 공주처럼 넓고 화려한 침대와 글을 쓸 나무향이 나는 책상이 놓여있는 그런 방이다. 이런 방은 저자의 시대에는 부모가 예외적으로 부자거나 높은 귀족만이 가질 수 있었던 물질적 상징이었다. 저자가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 의미는 결국 물질적으로 안정된 공간에서 얻어지는 지위가 여성을 정신적으로 독립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신의 능력을 감추지 마라. 재능은 쓰라고 주어진 것이다. 그늘 속의 해시계가 무슨 소용이랴.’라고 말했다.


여성이 스스로 당당하게 설 때 삶은 더욱 윤택하고 빛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가 강력하게 주장했던 경제적 자립이 되어 있을까. 남자대학의 오찬처럼 달콤하고 구수한 식탁 앞에 앉아 있을까.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 정원을 걷고 있을까.

오늘,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멋진 식탁에 한번 앉아보자.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민음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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