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늦여름의 해
처음 산 당도계의 0을 0으로 맞추고
청귤의 당도를 잰다
7.2브릭스
연녹색의 껍질 안에 진한 여름의 태양이 활짝 폈다
크기가 작다고
조금 긁혔다고
튼실한 다른 청귤을 더 튼실하게 하겠다고
솎아져서 버려졌을 여름의 청귤을 모아다가
꼭지와 엉덩이를 잘라내고 청귤 나박썰기를 한다
설탕을 청귤에 쳐서 김장하듯 버무리고
유리용기에 하나하나 담은 뒤 커피 한 잔 휴우우우
미지근한 물에 효모 풀어
오랜만에 일어나 밥 먹으라고 재촉한다
술술술술 효모물을 청귤 위로 뿌려주면
이제는 비로소 시간이 술을 빚을 차례다
이제 어느덧 청귤이 익어가는 9월. 청귤의 수확시기는 보통 8월 초에서 9월 중순이다. 당도가 높은 청귤을 사용하여 설탕 사용을 줄이기 위해 수확의 끝 무렵인 9월 중순에 와인을 담기로 했다. 청귤 껍질에는 자연효모가 없어서 양조용 효모를 알아 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청귤와인 레시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알아보면서 만들어가야 하기에, 무모하게 진행한 면도 있고, ‘과감하게 해보자’하고 진행한 면도 있었다.
효모를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유통되는 과일용 효모는 단 2종 밖에 없었고, 다른 외국산 효모는 해외 배송으로 코로나 상황에서 배송을 확답받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국내산 누룩을 이용해서, 그리고 기존의 효모 2종과 섞어서 나만의 효모 믹스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포도주 효모로 많이 쓰이는 랄빈 효모와 퍼미빈 효모, 복합 효모를 구입하고, 막걸리 제조에 사용되는 3가지 종류의 누룩도 샀다. 이 효모들을 조합해 총 18가지의 효모믹스를 만들어 청귤와인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크기가 작고 긁혀서 상품성이 없어서 버려지는 청귤 26kg을 미리 따고 씻어서 말려달라고 부탁했다. 당도계도 처음 써보고, 효모믹스의 종류도 많고 처음 사용해보는 거라, 막판에 인터넷으로 리서치하고 엄마에게 많이 의지하며, 청귤과 설탕, 효모 조합 간의 비율과 물의 온도를 찾아내어 총 18종류의 청귤와인 담그는 데 성공했다. 한 종류라도 끝까지 나와 함께 하기를 바라며 주력 조합은 큰 유리병에, 위험성 큰 조합은 비닐에 적은 양으로 실험하였다.
보글보글
부글부글
술이 끓네
유리병 안 효모들이
과즙의 당을 쪽쪽 빨아먹고
술 만들며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네
눈에 보이지 않는
효모 너마저도
방귀를 뀌는데
화덕에 큰 솥 걸고 지구를
팔팔 끓이고 있는 지구인은
솥 속으로 풍덩 빠져 다 죽겠네
제주도에서 학교에 다닐 때 항상 과학책 맨 마지막 장에 관심이 갔다. 대미를 장식하는 주제는 항상 환경과 공동체 문제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 주제는 수능에 나올 가능성도 아주 희박하거니와 나오더라도 아주 무난하게 나오곤 해서 선생님들은 그 대미를 아주 덤덤하게 혹은 후딱 일사천리로 넘겨버리곤 하셨다. 그렇게 나의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졌다.
내 영화작업에서도 기후변화를 다루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현실에서 외면하고 싶은 우울하고 비관적인 기후변화 스토리를 큰 극장 화면에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의 ‘빨간섬’ 시나리오를 읽은 한 사람은, 효과적인 기후변화 스토리텔링을 위해서는 기후변화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무기력함과 죄의식, 불편함을 뛰어넘어서는 기후행동을 이야기 안에서 제시하면서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청귤은 매년 버려진다. 적당한 크기의 귤만이 상품성이 있다는 이유로 엄청난 양의 청귤과 귤이 매년 제주도의 과수원 구석과 개천에 버려져 썩고 있다. 이 버려지는 청귤을 이용해 와인을 만들 수 있다면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고, 맛있는 로컬 와인도 만들 수 있으며, 우리 식탁 위의 와인은 태평양과 인도양을 건너온 무거운 유리병 안에 담긴 수입 와인일 필요가 없다. 더더군다나 대부분의 수입 와인은 대형선박 컨테이너에 실려 적도를 통과하면서 부글부글 여러 차례 끓어,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제맛을 상실한 상태이다. 청귤와인은 나의 자그마한 기후행동이 될 수 있을까?
효모를 사용하지 않았던 포도와인과는 다르게 효모를 사용한 청귤와인이 워낙 빨리 발효되어서, 혹시 이거 썩는 건 아닌지 걱정 반 기대 반이다. 하지만 내가 청귤와인 한 꾸러미 가지고 와서 와인을 국자로 섞어주고 비닐봉지를 주물럭주물럭하자, 코를 킁킁거리며 술 냄새 맡고 신기해하며 자기도 나와 같이 봉지를 주물럭거리는 2살짜리 조카 윤이를 보면서, 청귤와인이 또 우리만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하며 술 익을 날을 고대하고 있다.
글 최정은 @greentangerine_jeju
그림 윤미선 @studio_misun
이 글은 2021 서울예술교육센터 감정서가 출판워크숍 <감정출판>의 참여를 통해 진행되었습니다.
https://www.sfac.or.kr/site/SFAC_KOR/08/10827010000002020102202.jsp
이 글은 2021 서울문화재단 일상문화[BLANK] 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