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구슬나무의 서정

생각 꽃, 나무

by 풀잎


멀구슬나무에겐 말이야

그 나무와 마주한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홀림이 있어

나만 그런가 하였는데

문태준 시인은 여름 소나기를 피하려 멀구슬나무 아래로 뛰어들어간대 그곳에서 듣는 빗소리가 아주 좋아서 시인의 놋그릇 같은 귀에 빗소리를 넘치도록 그득그득 채운˚다나

안도현 시인은 철이 덜 든 멀구슬나무 대여섯 뿌리를 제주에서 경북 예천군 호명읍 황지리까지 이사시켰대°°

까르륵까르륵 하고 꽃이 필 날을 그리면서도

까르륵까르륵 멀구슬나무 꽃 피는 소리에 그만 과한 욕심을 부린 게 아닐까 걱정해 혹여 따뜻한 남쪽 나라 그리다 죽을까 염려한 것인데 어쩌겠어 이미 이사는 시켰고 잘 키워 황지리의 초여름 밤이 보랏빛으로 물들기를 바랄 밖에 나도 오가며 바람의 돌멩이 하나 얹어야겠어


나 말이야? 나도 어느 해 기청산식물원에서

멀구슬나무를 처음 만나 연보라색 꽃과 꽃 향기에 홀딱 반했더랬어 그 후로 해마다 5월이면 멀구슬나무 멀구슬나무 노래를 불렀더랬지

까르륵까르륵 꽃 피는 소리는 듣지 못하고

(이 소린 해맑은 아이 같잖아? 내게 멀구슬나무는 아이보다 그리운 여인의 느낌이거든)

초록으로 물든 오월의 숲에서

온 나무가 연보랏빛으로 가만하게 물들고 바람에 청량하고 달콤한 향 실려오면 깊은 계곡 맑은 소에서 목욕하는 선녀가 된 기분이 들어 한번 맡아봐 당신도 홀리고 말 걸 그나저나 예전엔 꽃과 향만 그렸는데 이젠 나도 멀구슬나무 아래서 내 귀에 빗소리 그득그득 담고 싶어져 어쩌지 어떤 귀가 되려나, 나무 그릇, 함석 그릇, 시인처럼 놋그릇? 궁금해

흐음, 하여간에 멀구슬나무 덕분에 내 마음에도 시인의 서정이 흐르는가 싶어 괜시리 흐뭇해지네 무엇에 홀리든 무엇을 홀리든 아름다움을 홀리고 싶은 마음 그게 시인의 마음 같기도 하거든




° 문태준, 「꽃이 환하니 서러운 일은 잊어요」, 마음의숲

°° 안도현, 멀구슬나무의 이사, 「쓸데없이 눈부신게 세상에는 있어요」, 문학동네



멀구슬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