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꾼 후에

생각 꽃, 꿈과 무의식

by 풀잎


꿈을 꾸었다.

혼자 산을 오르고 있었다.

덤불숲이었다.

산 아래에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났다!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잠시 후 불길이 나를 감쌌다.

나는 빠져나가려고 애썼지만 사방이 불이었고

불이 직접 몸에 닿지는 않았지만 매우 뜨거웠다.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뜨거움을 느끼며 깨어났다.

깨어나서도 몸이 뜨거웠다.

좋은 꿈이라고 했다.

기대하는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 달 전 메모를 보았다. 꿈의 내용보다 나는 그때 무엇을 기대했던 건지 궁금하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꿈을 많이 꾼다. 5분 남짓 쪽잠을 자다가 꿈에서 깨어날 때도 있다. 너무 선명하거나 이상한 꿈은 꿈해몽을 찾아보기도 하는데 무얼 믿어서는 아니다. 좋은 꿈도 들어맞지 않지만 나쁜 꿈도 맞지 않아서 개꿈임을 확인하며 조금은 아쉬워하고 대체로 안심한다. 대개는 꿈에서 지금 나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살핀다.


나는 꿈을 많이도 꾼다.

자주 시험을 보고 물론 망치고, 버스나 기차 비행기를 놓치고, 아이를 잃고 헤매고, 직장을 구하지 못해 동동거리고, 이사 간 집이 거의 폐허나 다름없고,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건물이 무너진다. 이 밖에도 반복되는 꿈들이 많다. 어려서는 귀신 꿈을 많이 꿨는데 지금은 여러 사람이 떼 지어 나오는 꿈을 꾸고 나면 마음이 어지럽다. 오늘도 이런 꿈을 꾸다가 일어났다. 몸이 무겁다.

해몽이 필요 없는 좋은 꿈도 있다.


현실에선 볼 수 없는 멋진 풍광을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가 꿈에서 본다. 가장 좋은 꿈은 온전하게 사랑받는 꿈이다. 그윽한 눈빛이나 따스한 포옹, 그것도 아니면 그저 '느낌'이 다하는, 저예산 독립영화 같은 꿈이다. 꿈이라서 가능한,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온전히 충만한 사랑. 이런 꿈에서는 깨어나기 싫어 어떻게든 연장하고 싶지만 일단 그 마음이 들었다는 건 이미 꿈임을 자각했다는 것, 곧 깰 것이라는 것을 안다. 깨어나도 괜찮다. 나쁜 꿈은 구체적인 데에 반해 금방 잊지만 느낌으로 남은 이 꿈은 종일 나를 행복하게 한다. 적어도 반나절은 비몽사몽 행복 속에 산다. 피식피식 헤실헤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날 세상 부드러운 사람이 된다. 모든 게 용서가 된다.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9:1 정도로 나쁜 꿈이 많다. 그럼에도 꿈이 싫지 않은 것은 꿈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꽤 많이 처리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해소하지 못한 감정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과거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영원히 안고 살아야 할 악몽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겠는가, 그것도 나인 것을. 내가 무엇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지금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평소 걱정 없이 사는 나는 꿈속에서 나의 불안을 만난다. 그렇게 나의 내면을 본다.


그리고 사랑.

사랑 따위, 냉소를 하다가도 온전한 사랑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 현실에서 느끼지 못하는 '온전함'이 꿈에는 있다. 아쉽지 않고 허망하지도 않다. 꿈에서 느끼는 만큼의 온전함은 아니어도 가끔은 비스무리한 감정을 현실에서도 느낀다. 꿈에서 느낀 감정이 없었다면 그것이 이것인지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찰나의 소소한 감정, 어떻게 설명은 되지 않지만 그 감정들이 나를 살게 한다는 것은 안다. 아주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꿈에서처럼 진하고 오롯이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나의 요 며칠은 꿈속을 산 것처럼 시간의 대부분이 뿌옇다. 지금은 뜨거운 여름. 의식까지 더위를 먹었나, 비에 잠겼나, 모르겠다. 조만간 꿈에서 깨어나 살 것이지만 세상이 언제는 선명하기는 했나, 싶다. 그저 무엇이 소중한지 희미하게라도 느끼며 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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