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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움 Jul 16. 2024

나만의 아빠가 아니다

아빠 공유하기

 나는 아빠와 사이가 좋은 편이다.

 고3때 시력이 많이 변했는지 쓰고 있던 안경이 너무 어지러워서 안경을 다시 맞추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평일이었고, 저녁 식사 후 야자시간 전에 아빠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 그날따라 아빠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의문이지만 아이들이 엄청 뛰어다니는 우리 교실 앞 복도에 서 계셨다. 급식실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다가 아빠를 발견한 난 너무 반가워 “아빠!”하고 뛰어가 안겼다. 그게 난 뭐 특별한 일도 아니었는데 나중에 친구들이 엄청 그게 신기했다고 했다. 아빠한테 그렇게 친하게 달려가서 안긴다는 게 ‘평범’한 일은 아니라는 걸 난 그때 알았다.      


 ‘아빠’에 대한 감정은 복합적이다. 앞선 예를 들 정도로 엄청 친근하고 지금도 엄청 친하다. 자잘한 부탁도 서슴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이. 아파서 자주 링거를 맞고 병원에 가야 했던 나를 위해 늘 달려와 주던 아빠. 내가 ‘딸’이라서 특히나 아빠가 날 많이 예뻐하고 사랑스러워했던 건 안다. 오롯이 느꼈으니까 (과해서 좀 너무 통제하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 늦은 밤, 이른 아침 등 여러 이유로 운전기사를 자처했고 고민 상담, 신앙, 심지어 연애 상담까지도 할 수 있는 깊이 있는 관계다.


 하지만 동시에 어렸을 때는 무서운 사람이기도 했다. 아빠가 ‘상담’에 대한 공부를 깊이 하고 본인의 상처를 많이 치유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더 부드러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전까지는 ‘목사’의 프레임으로 얼마나 자로 재듯, 그리고 엄하게 우리를 대했는지... 성경에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잠언 19장 20절)’는 아주 무시무시한 구절이 있다. 물론 우리 아빠가 이 말씀을 받들어 모셨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저 말씀에 많이 감명받았나 할 정도로 신앙, 교회에 관련된 일에는 엄청 엄격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뭐 다들 맞고 살았다지만(우리 때는 그랬다...아.. 올드하다..)나와 동생도 많이 맞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교회와 신앙 관련하여 규율(?)을 어겼을 때, 성도들에게 폐를 끼쳤을 때였다(채찍으로 때리진 않았다).

그래도 엄할 때 빼고는 늘 장난스럽고 친근한 아빠였는데 사춘기 때는 그런 양면적인 얼굴이 매우 극혐으로 치달았기도 했다.      


 어찌 됐든 내게는 하나뿐인 아빠인데, 이런 아빠를 ‘공유’해야 할 때가 많았다. 커서야 뭐 그런가보다 했지만 어린시절 내 아빠가 다른 아이들을 더 많이 안아주고 예뻐라 할 때의 감정은 참 어려웠다. 사랑을 독차지하던 첫째가 동생이 생겼을 때, 엄마를 빼앗기며 느끼는 감정이 ‘불륜의 대상을 내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정도로 엄청난 분노라는 것이다. 동생에게 뺏기는 것도 억울한데 생판 남에게 아빠를 뺏기는 기분은 어떠하겠는가.


 나를 안아줘야 하는데 다른 아이를 안아주고, 나에게 웃어줘야 하는데 다른 아이들에게 골고루, 공평하게, 혹은 더 많이 웃어줘야 하는 내 아빠. 나에게는 인색한 칭찬을 남들에게는 격하게 더 많이, 더 자주 하는 내 아빠. 그때부터 학습되었을 것이다. 아빠는 ‘나만의 아빠’가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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