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서 해방되기
“배우로서 사랑’받으려’ 온갖 애를 쓰는 나를 발견.
나는 ‘주고 싶어’서 이 일을 원했고 시작했는데..
자, 다시.
‘무얼 주고 싶은지’로 주의를 돌리자.
그건 곧 더 자유로워짐이다.
(2019.10.18)“
“I see so many people in the arts who are beaten down by either success or failure,”
“예술 영역에서 실패로 인해서, 뿐만 아니라 성공으로 인해서 완전히 무너져 내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어요.”
“I didn’t want that. I wanted to be hopeful.”
“그렇게 되길 원치 않았어요. 난 희망을 갖고 싶었어요”
- Ethan Hawke 배우 에단호크
(https://www.theguardian.com/film/2015/mar/12/ethan-hawke-seymour-bernstein-documentary-interview 발췌 및 인용)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 환상을 깨기
배우라는 직업은 정말로 ‘드러나는 직업’이다. 그러면서 받는 평가들, 특히 좋은 평가들은 치명적일 정도의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착각 = 괴리를 만들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이것 때문에 꽤나 자주, 꽤나 많이 혼란스럽고 괴로웠던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나를 몰아대며 어디서 왔는지 모를 어떤 이상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 내 모습들을 깎아내야만 한다고 여겼고 받게 되는 피드백과 평가들이 전부 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팩트(fact)’라 여기며 위축되기도 했다.
배우 ‘활동’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기억하고 유념할 수 있다면 매 순간, 늘 평가에 노출되어 있다 하더라도 일하면서 스스로까지 갉아먹는 일을 많이 방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박수를 쳐준다 한들 많게는 ‘내가 한 연기’, 작게는 ‘내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일구어 둔 작품에 정말 숟가락 하나 얹은 것에 대한 것’이지 내가 잘났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 아니며, 때로 비평을 한다고 한들 마찬가지로 내가 선보인 어떤 것에 대한 것이지 내가 죽일 놈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도 구분해 낼 수 있다면 말이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배우라는 직업은 특히나 환상, 즉 많은 판타지(fantasy)가 가미되어 있는 직업이다.
하는 사람에게나 보는 사람에게나, 어릴 때부터 그렇게 보고 듣고 겪고 느끼면서 자라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 환상이 환상이기 때문에 좋아한다. 즉, 사실이 무엇인지 보아야 할 필요 자체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건 전혀 잘못도 아니고 내가 어떻다고 평가할 수 있는 영역의 일도 아니지만, 난 이것을 기억하고 싶다. 동경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늘 같은 것은 않으며, 같아야 한다는 법은 더더욱 없다는 것. 내가 무언가를 동경한다고 해서 내가 바로 그것이 ‘되어야 한다‘는 법 또한 전혀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대학 시절부터 나를 지지해 주셨던 H교수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랑서야(그땐 예전이름을 부르셨지만),
무엇보다 연기 자체를 좋아하면서 -
그렇게 연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 오래 할 수 있고
그래야 잘할 수 있어. “
라고.
그냥 좋아서 해야 한다. 그래야 계속할 수 있어. 그 말이 그렇게 맴돌았다.
모두가 쫓는 목표와 나의 목표는 다르다
배우를 하면 모두가 똑같은 목표를 쫓아야 하는 것처럼, 그게 당연한 것처럼, 모두가 세뇌되어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해 보는 것은 가치가 있다.
어떤 일을 선택할 때, 특히 진로라던가 직업을 선택할 때 특히나 우리는 암묵적으로 특정 무언가를 원하고 추구하는게 당연하다는 느낌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자동으로 그런 선택을 하기도 한다.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은 다 (말로 하든 안 하든) 스타가 되고 싶어 한다는 가정, 되고 싶지는 않다는 사람들이 있어도 배우라는 직업의 끝, 즉 ‘정상’은 스타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은 아마 우리의 집단의식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생각일 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이것은 마치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재고의 여지없이 당연히 대학교를 가는 선택을 하는 것과 유사하게 매우 ‘자동적으로 세팅’이 되어있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배우활동을 하면서 아래와 같은 말을 적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목숨 걸고 해야지’
‘왜 목숨 걸고 안 해?’
누군가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건가? 아닐 이유는 뭔가? 아닐 이유가 없지만, 그래도 정말 내가 ‘내 목숨을 걸기를’ 원하나? 실제로 ‘죽으라’는 건 아닌 줄 알지만, 그저 ‘은유’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글쎄, 원하는 일을 추구하는데 꼭 그렇게 희생적이고 고통스러운 표현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할 필요는 무엇일까? 속된 말로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목숨을 왜 바치나? 좀 재미나게 하면 안 되나? 왜?
이런 질문은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꽤나 어렵고 스스로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나는 그 어려운 혼란을 피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남들이 기존에 세팅해 둔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다작’을 추구한다던가,
‘단역’보다는 ‘주연’을 선호한다던가,
‘무명’보다는 ’유명‘배우를 더 인정한다던가,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와 ‘좋아요’를 많이 받을수록 성공적인 것이라던가, ‘시켜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무엇이든지 하는 게 옳다’던가 - 하는 것들이 사실은 그럴만한 이유들도 수두룩하고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기도 하며 일리 또한 있다. 또 정말 가슴 깊은 곳에서 그것을 원하고 목표를 삼는 사람들이 없다는 게 아니다. 아주아주 많다. 틀렸네 뭐네 하는 것은 더더욱 말할 권리도 없다.
다만, 자신이 정한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의 방식이라던가, 속도, 시기 등등, 즉 자기만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데, 자기의 스타일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거나 만들려고도 하지 않을 때는 남들이 만들어 둔 기준에 정말 눈 깜박할 사이에 휩쓸려 가버리더라.
그렇게 되면 내가 뭘 원하는지, 왜 이걸 시작했는지가 점점 기억해 내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선택들을 해나갈 때 나의 기준점이 없어져서 그야말로 점점 더 카오스(chaos) 상태가 되기도 하더라. 나의 기준이 없으면 세상에 기준을 쫓는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생기는데, 그 기준이란 주로 다름 아닌 ‘돈’이나 ‘인기’ 등등, 그저 ‘이유는 모르겠고 그냥 더 많이 갖는 것’을 추구하는 방향이다. 심지어 ‘목숨’을 바쳐서.
안타깝게도 어떠한 좋은 마음에서 시작된 의도나 목표 없이 ‘그저 더 많은 것’만을 추구하다 보면, 특히나 자기 ’목숨‘을 바쳐서 파괴적으로 무언가를 쫓다 보면, 배우 에단호크 님이 언급한 것처럼, 그것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사람은 불만족하고 부족하다고 느끼며 불안해하는 상태, 더 심하게는 완전한 번아웃(burn-out)이 쉽게 되는 것 같다. 결국은, ‘매우 손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내 얘기다.
하지만 다행히도, 한참 그러한 기준과 목표를 쫓고 달리다가, 숨이 막히고 뭔가 길이 단단히 잘못됐다는 걸 인정할 수 있었던 어느 날, 나는 ‘다시 떠오르기’라는 의식계발 워크샵에서 배운 도구(tool)를 활용해 ‘내게 맞는 목표’를 다시, 스스로 정할 수 있었고, 그 순간 난 그 기존의 목표, 즉 추구하는 게 너무도 타당해 보였으나 실은 늘 찝찝하고 몸에 안 맞는 듯했던 주입된 목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느꼈다.
동료, 동료, 당신들 덕분에
사실, 본문 어디에도 쓰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중 하나가 있다.
바로 ‘동료’. 동료는 모든 것이다. 동료가 없으면 시작도 없고 중간도 없고 끝도 없을 것이다. 아니, 나에겐 끝만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 잠깐 통화되?”
좋아하는 동료에게 전화가 왔다.
“너는 그 역할을 할 때 어떻게 했어? 사실 너가 하는 연기 보고 자극받았어.”
이런 질문을 해주는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간다는 축복, 재미, 힘. 내가 흘린 피땀눈물을 궁금해해 주고 그것을 빼먹고 싶어 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니. 이건 정말이지 엄청난 격려이고 원동력이 되어준다.
서로의 실패와 성공이 뒤섞인 과정들, 또 결과들을 함께 공유하고, 질문하고, 칭찬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분명히 들을 가치가 있는 비판들 까지도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있으면.. 아마도 내가 원하는 한,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또 나 혼자서 고민했을 때 들여다볼 수 없는 부분을 스스로도 다시 발견하게 된다는 것도 또 다른 좋은 점이다. 이러한 ‘감성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동료라는 존재들이 주는 베네핏(benefit:이익)은 이성적, 물질적인 영역에서도 많다. 가장 크게는 ‘정보’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익들을 다 떠난다고 해도, 대체 동료 없이 하는 활동은 무엇을 위한 것이람?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동료에게 ‘너는 어떻게 한 거야?’라는 질문을 받는 영광을 얻고, 덕분에 나는 정말 ‘내가 어떻게 했지?’를 돌아볼 기회를 얻었고 그 순간 정말 나눌 수 있었던 말은 ‘너답게’ 그리고 ‘(너가) 재밌게’. 이 두 가지였다. 나는 정말 어떻게 하고 싶지? 나만 할 수 있는 재미난 게 뭐가 있을까?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나 자신에게 이 정도 질문을 해주는, 이 정도의 친절은 베풀며 살고 싶다.
“무얼 어떻게 하면 내가 재밌게 할 수 있을까?”
오늘은, 내게 큰 격려가 되었던 박노해 선생님의 시 ‘경주마’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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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
어느 날부터 경주마로 길러지고
너는 지금 트랙을 달리고 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좋은 사료를 먹고 좋은 기수를 만나
레이스에 앞서는 게 아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자신이 달리고 있는 곳이 결국
트랙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트랙을 빠져나와
저 푸른 초원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 박노해 '경주마',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수록 詩
(출처: 나눔문화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 http://www.nanum.com/site/poet_walk/807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