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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존 Jul 16. 2023

놀부마누라, 내가 할래요

뜻밖의 배역을 사랑하면 생기는 일

‘놀부마누라’를 만나다


나의 연기 활동의 시작은, 무려 2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간 속에 있다.


그 유명한 ‘흥부놀부 전’을 연극으로 올린다는데, 가장 인기가 많았던 역할은 다름 아닌 ‘착한 흥부 마누라’ 역할.


애석하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 말고도 그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었고 그녀는 하필 나의 단짝 친구였다. 배역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상황을 바라보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굳어졌던 그 아이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은 역할은 ’흥부마누라‘ 아니면, 못된 악당인 데다가 아주 못생긴 모습으로 묘사가 되어있던 ‘놀부마누라’ 역할이었으니.


더 이상 정적이 지속되다간 방 안 공기, 뿐만 아니라 단짝 친구와의 우정에도 냉전의 기류가 흐를 것만 같은 그런, 꽤나 긴장되던 - 어린이집에도 이런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 바로 그때, 나는 어디서 본 적도 없었을 영웅심을 발휘했더랬다.



놀부마누라 내가 할래요!




하나를 양보하고 얻은 것들


내 인생 가장 멋진 양보가 아니었을까?


아니 그것은 어떤 수동적인 양보라기보다는 기분 좋은, 적극적인 자원의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하겠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내 인생 첫 배역인 ’놀부마누라‘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뭐든지 그런가 보다.


어떤 일을 할 때 즉각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마음.

즉 욕심은 이상하게 그 마음과 행위 자체가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그런 요상한 마음이다.


욕심으로 이득을 취해봤자 사실 내가 얻는 것은 이기심과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 당장 더 많이 가지고 싶을 때 아주 조금만, 딱 한 치 앞만큼만 이라도 멀리 내다보고자 노력하면 때로는 되려 뜻밖의 것들을 얻게 되기도 한다.


7살의 나는 그날 - 인생 첫 배역에 대한 사랑, 마음껏 과장하고 표현하는 즐거움, 보는 사람들 까지 즐겁게 했다는 성취까지 얻은 것으로 보인다. (표지사진)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내가 오랜 시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연기’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 여기에 나를 있게 하는 시작점이었는지도.




뜻밖의 배역들을 사랑하면


약 15년이 지난 시점에 나는 ‘연기’를 전공하는 예대생이 되어있었고, 3년간의 학교 생활을 하며 약 열 가지 내외의 배역을 맡아 연기를 했는데, 그중 어린 나의 ‘놀부마누라’와 같은 ‘뜻밖의 배역’들이 반 정도 되었다.


‘킴’을 하고 싶었지만 ‘지지’ 역할을 받았고,


‘목련’이 하고 싶었지만 ‘옥희’ 역할이 잘 맞겠다 하였고,


‘점례’를 준비했지만 ‘귀덕’ 역할을 할 사람은 너뿐이라 하였으며,


‘센테’역은 정말 내게 잘 어울리리라 여겼지만 화이트보드에 쓰여진 내 이름은 ‘양 씨’ 역할 옆에 또렷이 적혀있었다.


해당 제작반이 아니라 늦게 합류했다는 이유, 내가 받은 역할이야말로 정말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이유, 등등으로 자타가 나를 위로했으나 설득이 되진 않았고 그냥 그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나만이 이 역할을 가장 그들답게 연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배우이며, 이 배역을 내가 맡고 준비하고 무대에 올리는 시간 동안만큼은 이 세상에 ‘지지’는, ‘옥희’는, ‘귀덕‘과 ’양 씨‘는 오직 나만이 해낼 수 있다고.




그렇게 마음은 요상하다.


내 뜻을 벗어나는 결과를 눈으로, 귀로 확인하는 순간에 당혹스러움과 실망감 그리고 ‘내가 뭐가 부족해서!’ 하는 강렬한 뾰로통함이 몰려오는 걸 피할 순 없겠으나,


 ‘뜻밖의 배역’들을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 정말 매번 사랑에 빠졌고 결국 한 순간의 후회도 없는 연기를 스스로에게 선물하고 관객과 나눌 수 있었다. (완벽했다는 뜻은 아니고)


인물들이 너무 사랑스러웠고 귀해서 제대로 해내고자 하는 불씨가 나를 앞으로 가도록 부추겼다.


그래서 매 순간 즐거웠고 진심을 다했기에 뿌듯함과 감사함만 남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 그 시간으로 돌아가 배역을 선택할 기회를 준다고 하면, 난 내가 만났던 그 배역들을 선택할 것이다.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난 그 인물들을 사랑하니까. (물론.. 조금 고민은 하겠지, 주인공이 무거운 만큼 짜릿한 건 사실이니까. ^*^)


어쩌면, 놀부마누라를 만난 그날의 내가 훗날에 나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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