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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의꿈 Jul 08. 2020

백수 3단계

어쩌다 백수

백수 생활이 반복되다 보면 노하우가 생긴다. 나름의 규칙도 생긴다.

아침엔 늦지 않게 일어나야 하고, 하루 세끼는 다 챙겨 먹어야 한다.

배달이나 편의점 말고 집밥으로 요리해서 먹어야 한다.

시장을 볼 때는 한꺼번에 많이 사지 않는다. 딱 그때 먹을 거만 사 온다.

목적성을 두고 매일매일 움직이게 해야 한다.

바깥공기도 마셔야 하니 저녁엔 산책이 필수다.

경제 사정도 알아야 하고 주식과 재테크는 기본이다.

휴일도 지켜야 한다. 쉬는 날은 쉬어야 한다. 백수생활을.   


물론,

백수 1단계는 모든 게 내 마음대로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하루 종일 뒹굴뒹굴하던지 여행을 하던지 모든 게 내뜻 데로 내 자유다.

하고 싶은 거, 해보고 싶었던 거 다 해보면 된다. 그런데 막상 백수가 되니 하고 싶은 게 사라진다. 해보고 싶은 것도 없다. 무기력해질 때가 오면 2단계로 넘어간다.    


2단계 취미를 찾자. 취미를 가져봐.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아 이것저것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된다.

문화센터를 찾거나 도서관을 찾거나 평생교육센터를 찾거나 아무리 찾아도

맘에 드는 게 없다면 할 수 없다. 못 찾았으니 더 찾아봐야 한다.

그렇다고 하이에나처럼 어슬렁 거릴 필요는 없다.  결국 뭐라도 찾게 된다.

취미를 찾았으면 3단계로 넘어간다. 백수에게 취미는 직업과 같은 의미다.     


3단계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이쯤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직장인처럼

출근시간에 맞춰 일어나 아침을 먹고 일을 시작한다.  

하트도 쏘고 총공도 하고 음원도 다운로드하고 댓글 인재가 되어 좋아하는 연예인 덕질을 마구마구 한다.  

요즘은 팬클럽 덕질 보다 브런치에 빠져 시간이 아주 잘 가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점심시간을 놓쳐선 안된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저녁 먹을 찬거리를 사러 간다.

일부러 먼 곳에 있는 마트까지 걸어서 간다. 한낮에 보는 풍경도 재미가 솔솔 하다.     

백수니 조금 이른 저녁을 해 먹어도 될 거 같다.

저녁을 먹고 삼십 분 소화될 시간을 기다린 후 산책을 하러 나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간다. 주변에 아름다운 산책길이 있으면 금상첨화.    


우리 동네 근처에 아름 다운 산책길이 있다는 걸 10년 만에 처음 알았다.

백수가 되니 보였을까.  뭘 깊게 느끼고 생각하는 건 못하겠다.

아파트 앞으로만 다녔지 뒤로 가본 적이 없었으니 모를 수밖에.  

어쨌든 요즘 백수가 되고 3단계까지 와보니 주변을 살피게 되었는데 정말 기가 막힌 산책길이 있었다.

둑길 좌우로 예쁜 꽃들이 레드카펫처럼 깔려있고 길게 뻗은 가로수들은 맑은 공기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파트와 아파트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천 의 물줄기는 한 장의 실크로드 같다.  

가끔 희고 고운 새가 날아와 놀다 가기도 한다. 오늘은 물놀이하는 아이들도 보인다.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 장

사진으로 남겨도 될 만큼 모두 행복해 보인다. 그 사이를 걸어가는 나도 저절로 행복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럼에도   

나는 백수가 싫다. 80까지 일하고 싶다. 그런데 백수생활에 점점 재미가 들 것 같다.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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