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자라는 나무

by 싱긋



따로 또 같이 쓰는 첫 문장

: 고학년이 되었던 어느 날,

우연히 친구를 따라갔던 ~에서




고학년이 되었던 어느 날,

우연히 친구를 따라간 도서관에서

작은 씨앗 하나를 얻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하굣길에 친구를 따라 동네 도서관에 갔다. 공공도서관이라는 존재 자체를 전혀 알지 못했던 터라, 집 근처에 버젓이 자리한 도서관의 등장은 내게 난데없는 발견이었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난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되돌아보면 특별할 것 없는 오래된 도서관이었지만, 그날 내 눈에는 세상 무엇보다 눈부셨다. 쾌적하고 넓은 공간, 빛나는 조명, 정돈된 공기. 무엇보다 누구나 도서관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가진 게 없어도, 자격이 없어도, 누구 하나 출입을 막지 않았다. 도서관은 모든 이들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으리으리한 도서관이 모두의 것이라니 신기하기만 했다.



친구는 자료를 복사하려고 도서관을 찾았던 것 같다. 큰 복사기 주위를 서성이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자료실조차 들어가지 않아, 그저 웅장하게 빛나던 도서관 건물의 인상과 로비를 덮던 시원한 공기만이 또렷이 남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다. 숨은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뻤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도서관을 다시 찾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날, '도서관'이라는 세 글자가 내 안에 씨앗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생각해보니 더 오래 전인 국민학교 시절, 방과 후 학교 도서관 서가를 정리하던 기억이 난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한적한 오후, 찾는 이 없이 한가로운 도서관은 나만의 비밀 아지트 같았다. 책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나는 늘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편안한 숨을 쉬었다.



아마도 그 친밀감이, 훗날 중학교 때 공공도서관에서 느꼈던 감탄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도서관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놀라운 장소였다. 그리고 내게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던 깊은 평안을 주는 곳이었다. 그것은 내 삶에서 손에 꼽히는 대단한 발견이었다.



그날 얻은 도서관이라는 씨앗은 천천히 뿌리를 내렸다. 진로를 고민하던 고등학생은 문헌정보학을 선택해, 대학에서 전공하며 줄기를 뻗어갔다. 직장인이 되어 도서관에서 일하며 싱그런 잎을 틔웠다. 결혼과 육아로 도서관을 떠났지만, 도서관은 다시 나를 불러냈다. 육아로 힘겨운 시간을 지나며, 책 속에서 오래 묵은 결핍을 풀며 꽃을 피웠다. 그리고 40대가 된 지금, 작지만 단단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작은 씨앗 하나가 끊임없이 자라나 한 세계를 이루었다. 그 씨앗은 오래 숨어 있었지만, 자라기를 멈춘 적이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스쳐 지나간 도서관의 추억들이 내 평생을 지탱해 줄 줄은 몰랐다. 이제는 조금 알겠다. 삶을 바꾸는 힘은 거창한 사건들만큼이나, 가슴 속에 남은 잠깐의 순간에도 며있다는 것을 말이다.



언젠가는, 내게서 떨어진 씨앗 하나를 다른 삶에도 건네고 싶다. 소리 없이,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으로.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누군가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고 싶다. 도서관이라는 이름 아래, 풍요로운 삶을 함께 키우며.



조용히 자란 또 다른 씨앗을 품고,

나는 나무처럼 고요하고 단단하게

오늘도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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