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하면 또 무너질까봐

무너질까봐 , 사랑을 미루는 마음에 대하여

by 그릿 grit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잃는 건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인 것 같다.


다시 좋아해도 되는지,

다시 기대해도 괜찮은지,

이번에는 정말 괜찮아질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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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는

사랑이 나빴기 때문이 아니다.

무너졌던 기억이

너무 또렷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다시 사랑하면

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그 가능성 자체가

겁이 난다.


한 번 무너져 본 사람은

넘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넘어진 뒤의 풍경을 기억한다.

아무도 옆에 없던 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던 얼굴,

괜찮은 척하며 버텨야 했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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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마음은

다음 사랑 앞에서

본능처럼 브레이크를 밟는다.

이번에는 조심하자.

이번에는 깊게 가지 말자.

이번에는 너무 믿지 말자.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을 경계하는 마음.

그 모순 속에서

우리는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아직은 안 되는 걸까?”

사실 그 질문의 진짜 뜻은

이것에 더 가깝다.


“이번에 또 무너지면

나는 나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사랑이 무서운 게 아니라

다시 혼자가 될 내가

무서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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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미루고,

사람을 관찰하고,

마음을 반쯤만 꺼내 놓는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나는 요즘

이 두려움을

나약함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이건

경험해 본 사람만이 가지는

신중함이고,

한 번 무너진 뒤에도

다시 살아낸 사람만이 아는

본능 같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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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랑한다고 해서

이전의 내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더 조심스러워진 채로 사랑해도 되고,

확신보다 질문이 많은 상태로 시작해도 된다.

사랑의 방식은

바뀔 수 있어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니까.


어쩌면

다시 사랑한다는 건

또 무너질 각오가 아니라,

무너져도

이전처럼 나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일지도 모른다.


예전의 나는

사랑이 끝나면

나까지 끝내버렸지만,

지금의 나는

무너져도

나를 데리고 나올 줄 안다.

그 차이가

나를 조금 덜 겁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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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의 나는

사랑을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닫아두지는 않는다.

다시 사랑하면

또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무너질까 봐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삶 역시
다른 방식의 붕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아직 사랑중이라는 말은

용감하다는 뜻이 아니라

겁이 나도

마음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늘의 나는

그 정도의 용기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릿 G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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