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는 언 땅의 흙을 움켜쥐며 더 아래로 향한다. 무언가 터져 나올 봄
어제까지 2월이었고 오늘부터 3월이다. 벽에서 낡은 2월을 걷어내고 3월을 걸었다.
무심히 바라본 하늘 2월의 끝날이었던 어제와 3월 첫날이라는 오늘의 하늘. 별 차이가 없다. 밤새 내린 비로 젖어있다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달력에 그려진 3월은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작품이다. 연초록 잎이 막 돋아나기 시작한 공원 밴치에 한 남자가 앉아있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그린 작품이다.
2월의 나무는 마른나무였다. 그 메마른 나무의 끝을 바라보다가 그 나뭇가지가 '하늘'이라는 거대한 유리창에 금을 낸 것처럼 보였다. 마른 가지 끝은 잘 깎인 연필심처럼 뾰족하였고 초봄의 여린 하늘은 금이 가 있었다.
나무가 그려낸 난해한 추상화였다.
2월 나뭇가지의 끝에 뾰족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뜨거운 것들이 영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 뜨거운 것들은 내부의 힘으로 끓어올라 터져 나올 것이다. 하늘에 나무가 낸 금들은 어느 순간 꽃그림으로 바뀌어있을 것이다.
어릴 적 나는 벚나무가 팝콘 나무처럼 보였었다. 멀리서 보면 나무가 갓 튀어낸 팝콘을 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봄은 무엇이든 펑펑 터뜨리는 계절이다. 봄의 축포를 쏘기 위해 나무는 오늘도 준비 중일 것이다.
신기했던 유년의 기억 하나, 뻥튀기 아저씨가 있었다. 무엇이든 뻥 튀기 기계에 들어갔다 나오면 몇 배는 부풀어져 튀어나왔다. 지금이야 어디서든 뻥튀기를 살 수 있는 시대지만 그때는 뻥튀기 아저씨의 트럭이 마법의 트럭처럼 보였던 때였다. 나무들도 몸 안에 뻥 튀기 기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몇 십배, 몇 백배로 튀어 낼 '봄'들이 대기 중인 것이다. 나무들의 끝에서 튀어나오는 봄들. 경이로운 것들.
그 모든 것들은 끝이 만들어낸 시작들이다,
<뿌리가 나무에게>
네가 여린 싹으로 터서 어둠을 뚫고
태양을 향해 마침내 위로 오를 때 나는 오직 아래로
아래로 눈먼 손 뻗어 어둠 헤치며 내려만 갔다
네가 줄기로 솟아 봄날 푸른 잎을 낼 때
나는 여전히 아래로 더욱 아래로 막힌 어둠을 더듬었다
네가 드디어 꽃을 피우고
춤추는 나비들과 삶을 희롱할 때에도
나는 거대한 바위에 맞서 몸살을 하며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바늘 끝 같은 틈을 찾아야 했다
어느 날 네가 사나운 비바람을 맞으며
가지가 찢어지고 뒤틀려 신음할 때
나는 너를 위하여 오직 안타까운 마음 일 뿐이었으나
나는 믿었다
내가 이 어둠을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있는 한
너는 쓰러지지 않으리라고
모든 시련이 사라지고 가을이 되어 네가 탐스런 열매를
가지마다 맺을 때 나는 더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잎 지고 열매 떨구고 네가 겨울의
휴식에 잠길 때에도
나는 흙에 묻혀 가쁘게 숨을 쉬었다
봄이 오면 너는 다시 영광을 누리려니와
나는 잊어도 좋다
어둠처럼 까맣게 잊어도 좋다.
- 이현주 -
나뭇가지에 핀 봄은 가지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현주 시인의 시 < 뿌리가 나무에게>는
뿌리가 나무에게 전하고 싶은 독백이다.
네가 여린 싹으로 터서 어둠을 뚫고 하늘을 더듬을 때 나 (뿌리)는 오직 아래로 눈먼 손 뻗어 아래로만 내려갔다. 네가 줄기로 솟아 봄날 푸른 잎을 낼 때 나(뿌리)는 더 아래로 여전히 아래로 막힌 어둠을 더듬었다. 네가 춤추는 나비들과 삶을 희롱할 때 나(뿌리)는 거대한 바위와 맞서야 했다.
네가 사나운 비바람에 맞서 신음하는 날 그래도 나(뿌리)는 널 믿었다.
네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나(뿌리)는 온몸으로 어둠을 더 끌어안겠다고 했다. 그 시련이 지나 네가 열매를 맺기 위해 몸부림칠 때 너에게 줄 한 방울의 물이라도 더 얻기 위해 나는 다시 아래를 향했다.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겨울의 시간. 네가 겨울의 휴식에 잠겨있을 때 나(뿌리)는 얼어붙은 흙을 거세게 움켜쥐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봄이 오면 너는 다시 찬란한 영광을 다시 누릴 것이다. 그때 너는 나를 잊어도 좋다. 어둠처럼 까맣게 잊어도 좋다..... 뿌리가 말한다.
2월의 마른나무 아래에 서면 뿌리의 비장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환희와 공포, 두려움과 셀렘, 기다림, 시작.... 나무는 늘 시작 중이다. 단 한순간도 그 시작을 멈춘 적이 없다.
3월... 시작의 달이다. 새로운 학기의 시작. 새로운 계절의 시작, 새로운 삶의 시작.
찬연하게 꽃 피운 것들의 아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헌신을 깨닫는다. 누군가 위를 향해 나아갈 때 누군가는 더 아래를 더듬어야 한다. 누군가 삶을 희롱할 때 누군가는 벽과 맞서야 한다.
누군가가 피워낸 열매와 잎과 꽃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헌신, 땀, 눈물 같은 것임을............
다시 실감하는 3월 첫날이다. /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