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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역에서 당신의 삶을 마주하다

경주(2014. 개봉작)/ 장률감독/

경주 낯선 역에서 당신의 삶을 마주하다 

67회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 후보작 장률 감독         


최현 :  동북아정세를 연구하는 북경대 교수, 중국인 아내를 둔 남자, 배이징 거주

윤희 : 아리솔의 찻집 주인. 경주의 여신이라 불리우는 미모, 전남편은 우울증으로 자살

여정 : 최현의 7년전 연인, 결혼후 의처증 남편으로 인해 몹시 고통받는 생활

영민(이형사) : 공윤희를 사랑하지만 애인은 아닌 모호한 관계, 일종의 흑기사, 수호천사   


 

  당신에게 경주는 어떤 곳인가? 기차를 타고 낯선 역에 도착하여 내릴 때 제일 먼저 맡게 되는 것은 그 도시의 내음이다. 푸른눈의 하버드대 출신 현각스님이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도시 전체에서 풍기던 연탄 내음이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낯선 역에서 우리는 어떤 기대감 같은 것, 두려움같기도 하고 설렘같기도 한 것을 느낀다.

  경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다. 서라벌 화랑들의 말발굽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 하고, 나무 재단 위의 문희가 슬피 우는 소리, 마의 태자가 지팡이를 두드리며 걷는 모습, 걸인들과 춤을 추며 요석 공주를 품에 안은 원효스님의 기인 같은 모습, 첨성대 앞에서 서성이는 선덕여왕의 쓸쓸하고 고적한 모습도 눈에 보이는 듯하다.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떠오르게 한다. 7년만에 한국을 찾은 최현교수의 1박 2일 추억 찾기가 핵심이지만 영화 곳곳에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묘미가 있는 작품이다.

북경대 교수인 최현은  친한 형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고, 뜻하지 않게 1박2일 경주 여행을 계획한다. 로멘틱한 첫사랑의 주인공 ‘여정’에게 전화를 걸어 경주로 와달라고 말하는데, 여정은 의처증 남편에게 쫓기며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 사주쟁이 할아버지는 느닷없이 ‘당신은 아이가 없을거요’라는 말을 남기고 여정은 펑펑 울며 오래전 최현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말을 뒤늦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돌아가는 기차역에서 최현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자신의 사진을 지우며 “모든 것은 지워버려야한다”고 체념하듯 말한다. 그녀가 아이를 지웠듯 기억마저도 지워버려야 한다.


 여정과의 만남에 도리어 회의와 번민에 휩싸인 최현은 7년 전 가본 적이 있는 찻집 ‘아리솔’을 찾아가고, 그 곳의 여주인 공윤희를 만나는데 대뜸 “이곳에 그려진 춘화가 안보이네요?”라고 묻다가 속물 혹은 변태로 취급받는다. 최현은 7년 전 술을 마시던 방의 벽에 그려진 춘화야말로 그 방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는 생각을 한다. 최현이 다시 보기 위해 찾아간 아리솔의 '춘화'. 과거에는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벽 어딘가에 남아있을 춘화. 죽은 이의 무덤을 바라보며 일상을 사는 경주 사람들.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욕망, 최현의 추억 찾기는 이런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공윤희의 계모임에  함께한 ‘북한학’전공 교수는 위선적인 학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최현에게 “김정일 체제가 얼마나 오래갈까요?” 라고 묻자 

“100년”

“당신 진짜 교수 맞아? 지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이에 대해 최현은 “내게 학문은 마치 똥과 같아요.”

 교수는 학문에 대한 모독이라며 격분하고  터지기 직전의 살벌한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사람은 바로 아리솔 여주인 공윤희다. 노래방에 이어 늦은 시간 공윤희, 이형사, 최현은 경주의 늦은 밤 거리를 산책하듯 걷는다. 술에 취한 공윤희는 비틀거리며  오릉에 올라가

 “나 죽으면 이 안에 들어가 잠들고 싶어요.” 흐느끼듯 속삭인다.


나지막한 산과도 같은 오릉. 그 안에 잠든 신라인들.. 그리고 신라인들의 이루지 못한 꿈

  최현은 얼떨결에 공윤희 집에 따라가는데  공윤희가 동그란 물방울 무늬의 커튼을 치우자 거대한 오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여기 경주에선 능을 보지 않고는 하루도 살지 못해요”

“사랑은 흩어지고. 달은 기운다”

최현은 그녀 전남편이 걸어 놓은 액자 속 글귀를 천천히 소리내어 되뇌인다.  

각자의 방에서 공윤희와  최현은 애매모호한 하룻밤을 보낸다. 액자속 글귀처럼 사랑은 흩어지고 달은 기운다. 

 


  최현의 전공이 ‘동북아정세 연구’분야라는 점에서 경주가 갖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중국의 베이징에서 중국인 아내와 살고 있고, 한국에서 7년전의 연인 여정,  그리고 그를 배우로 착각한 일본인 관광객, 업무상 야노씨와의 대화.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경주를 사이에 두고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낯선 여인의 아파트에서 이른 새벽 오릉을 보며  최현은 중국인 아내가 불러주는 ‘모리화’를 듣는다. 이 영화의 매력은 절제된 힘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없이 경계를 유지해가는 것. 경계를 서로 침범하지 않고 더듬어 가는 것이다. 신경주역에서 만난 노란옷의 소녀와 젊은 엄마의 죽음. 신나게 질주하던 폭주족의 죽음. 윤희 남편의 죽음. 영화에서 줄곧 등장하는 죽음은 삶의 또다른 얼굴이다.


  “여기 작은 돌 다리가 있고, 그 밑에 물이 흐르고 있지 않았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최현은 길 잃은 사람처럼 여기 저기를 방황하다가 우연히 메마른 돌 틈 사이에서 선연한 강의 울음 소리를 듣는다. 춘화 한 장의 기억을 더듬어 낯선 도시를 찾아 익숙함을 찾고자 했던 그에게 경주의 익숙함은 도리어 낯섦으로 다가온다. 낯선 여인에게서 익숙함 (자신의 지난날의 사랑과 같은) 을 찾고자 했던 최현,

7년 만에 마주한 경주는 최현에게 무엇이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삶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극동의 끝이면서 한국의 끝이기도한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중국인 아내의 ‘모리화’를 듣는 것이 낯설지만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사랑은 흩어지고 달은 기운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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