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과 사라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 샛노란 것들이 있다
늦은 오후의 비스듬한 황금 햇살 속에서
집들의 무리가 가만히 타오르고
소중한 짙은 빛깔들 속에서
하루의 마감이 기도처럼 꽃핀다
서로서로 마음 깊이 기대어 서서
언덕에서 형제자매처럼 자라고 있다
배우지 않았지만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처럼 소박하고 오래된 모습으로
담장들, 회칠한 벽, 비스듬한 지붕들,
가난과 자존심, 몰락과 행복,
집들은 다정하고 부드럽게 깊게
그날 하루의 빛을 반사한다
<저녁 무렵의 집들> 헤르만 헤세
어제 내린 비로 거리에 샛노란 은행잎이 날린다. 차들이 달릴 때마다 자리에 누운 은행잎들이
부스스 일어나 춤춘다. 해마다 맞이하는 풍경이지만 유독 올해의 노란빛이 고와 보이는 것은 아마도 아파트 재개발로 인해 이곳의 은행나무들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심리적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늘 다니는 도서관 골목길, 뿌리내린 지 꽤 오랜 은행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x자가 테이프가 붙은 빈집들.... 예전에 그곳에 살던 누군가 말했다. 11월의 은행잎은 공포다고....
지나가는 이에게는 낭만이고 아름다움이지만 은행나무 옆집은 마당으로 마루로 방으로 수시로 날아드는 은행잎, 그 은행잎들, 그리고 동그란 열매의 지독한 냄새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는 말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햇살이 비치는 곳, 샛노란 은행잎들 위로 은행나무의 긴 그림자가 누워있다.
착시현상인지 그림자마저 샛노랗게 보인다. 몇 년 전 베이징에 갔을 때 은행나무를 보고 반가웠던 생각이 난다. 가장 동양적인 나무. 베이징의 은행나무는 한국의 은행나무와 색채가 약간 달랐다. 한국의 은행나무가 샛노란 색, 황금색이라면 중국의 은행나무는 칙칙한 노랑빛. 오렌지빛이 약간 섞인 주황빛 노랑이었다. 아마도 약간의 기후 차이일 것이다.
팽팽한 가을 햇살 아래. 가을이 나른한 숨을 토하면 나무는 두 팔을 세차게 흔들어 황금 조각들을 우리에게 보낸다. 달리는 차들 위로, 걷는 사람 위로 마구 마구 쏟아지는 황금 부스러기를.. 이 계절의 선물이다.
담장들, 회칠한 벽, 비스듬한 지붕들, 가난과 자존심, 몰락과 행복...
재개발로 생겨난 빈집들.... 가격은 이미 오를 대로 올랐다.
도란도란 이야기가 사라진 곳, 아마도 새로 지은 아파트는 은행나무의 눈물 위로 세워졌다는 사실은 그들은 알까?